이반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책리뷰

by 이건우

언제부터였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를 뒤따라오게 된 것은.


죽음이라는 운명의 그림자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짓눌렀다. 내가 일구어 왔다고 생각했던 성과들, 노력, 관계, 재산 등이 어느 한 순간에 모두 무너져 버리게 된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가.


스물 넷, 한창 허무함에 괴로워하고 있을 무렵. 어느새 대학교 3학년이 되어있던 나는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안에 품고 답은 내리지 못한 채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직 잘은 모르겠으니 지금껏 해왔던 대로 관성에 몸을 맡겨 전공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 공허함이 남아있었고 결국 어느 결정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 남은 대학생활을 흘려 보냈다.

2년이 흘러 여러 개인적 좌절들과 관계의 단절, 회복,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에 대한 경험을 겪은 뒤 최근에 와서 내린 결론은 ‘죽음은 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없애고 나를 짓누르는 압박과 절망들을 지워버리니 해방이 곧 아닌가, 좋은 것뿐 아니라 나쁜 것들도 모두 사라지게 하는 죽음이란 과연 좋은 것이다’ 라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눈에 들어왔고 이미 죽음에 초연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금세 깨달았다. 자만했다는 사실을. 나는 죽음에 대해 너무도 평면적으로 쉽게 바라보았고 성급히 결론을 내렸으며,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사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날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만하게 판단하였다. 그 이유로 죽음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로병사. 우리의 끝을 기다리는 장면은 병상에 누워 고통 속에 숨을 거두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살아생전 그 어느 특별해 보이는 사람도, 인류의 위대한 업적에 공헌하여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도, 너무 많은 실수를 범한 사람도, 죄를 저지른 사람,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다.


이 공포가 우리를 더 괴롭게 한다. 내 몸과 정신이 부서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끝을 가는 과정 자체. 바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을 정도로 아픈' 것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감기몸살과 타박상, 사람에 따라서는 중한 병까지. 이 정도의 아픔도 불쾌한데, 과연 죽음 직전의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인가.

작 중 이반 일리치의 말 "고통이 커질수록 삶은 가장 지독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마지막을 향해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떨어졌다." 처럼. 현재의 고통이 클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즉,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현재의 고통 너머 미래에 예정된 고통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은 불가하다.

세상 모든 이가 고통의 결말을 봐왔고 앞으로도 볼 것이라는 비관은 타당한 것이 된다. 안락은 오로지 유년 시절의 몫이니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현대의 과학으로 발전된 과학기술도, 종교에 대한 믿음도, 주변인들의 관심과 사랑도 우리의 고통을 낫게 할 수 없다.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분명 죽을 만큼 괴로운 고통이다.


그래도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엔 억울하다. 죄도 없이 벌을 받는 기분. 마치 나에 대한 법적 판결을 판사와 검사, 변호사 무리 저들끼리 진행하듯, 나에 대한 병의 진단을 의사 무리 여럿이서 나를 제외하고 논의하듯. 나에 대한 중요한 문제에서 정작 나는 소외되고 있다는 이방인 느낌. 이런 기분으로 끝을 맺기엔 너무나 억울하다.

그러니 이반 일리치가 죽는 바로 그 순간, 마지막 장(12장, 민음사)을 주의깊게 바라보자. 이반 일리치는 생과 사를 넘어갈듯한 그 찰나 죽음을 빛으로 묘사했다. “그는 예전의 습관대로 죽음의 공포를 찾아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공포도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이렇게 기쁠 수가!’”

과연 그렇다. 죽은 후엔 더이상 나를 괴롭히는 죽음이 없지 않은가. 죽기 전까진 괴롭다 하더라도 몸과 정신이 죽어 모든 감각과 신경이 사라진다면, 고통을 겪는 '나' 자체도 없으니.... 나의 죽음은 곧 해방이 아닌가. 죽음은 그 자체의 공포라기 보다 죽음이 곧 오고말것이라는 불안의 공포이다.

이반 일리치가 끝내 깨달은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심지어 나에게도 고통을 제거하는 좋은 일이 생긴다고. 이제 삶의 미련은 없다. 죽음에 대한 저항도. 남은 것은 그 빛으로 향하는 길뿐이다.


죽음 후 그 주변인들의 세계는 다시 변화한다. 공직자의 자리가 비어 인사이동이 일어나고, 가정에서의 역할과 기대가 변하고,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한자리에 소집되어 그를 추모하고 다시 그들만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일상을 즐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살아있는 자들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그것이 세속적인 이유이든, 성숙에 대한 것이든) 죽음은 그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는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왔고 죽음조차 그 주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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