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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Oct 18. 2024

조커2 리뷰 -지워진 인간, 아서플렉 (*스포있음)

조커 : 폴리 아 되


갖은 혹평의 인터넷 리뷰들을 보고 미루다 이제야 보았다.

아침조조였지만 이렇게나 사람이 없다니. 토요일 10시 영화인데도 관객은 단 3명뿐. 다들 나처럼 인터넷 사람들의 혹평을 보았나보다. 다만 나는 이동진평론가의 호평을 믿기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수 있었으리라.



영화는 좋았다. 완성도 측면에서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혹평은 영화에 대한것이 아니라 단지 원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것에 대한 불평이었던 것같다.

영화 초반부터 감독의 의도가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조커 1이 일으킨 사회적 현상에 대해 감독은 답을 내리고 전해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직설적이다.


마치 돈키호테2편처럼 조커의 행적에 관한 영화가 본 영화 속에서도 유행이 되었고 갖은 정치적,사회적 문제와 얽히면서 사회에 굉장한 파급력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현상을 해석하곤 관객에게 던진다. 과연 영화 '조커'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고 분노를 표출하게 만들어버린 사회시스템 자체가 문제인지.

너무나 쉽게 강자와 약자를 편가르고 탄압하는 세상. 사회 중심부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쉽게 폄하하며 그들의 노력과 재능이 부족한 탓이라고 밀어붙힌다. (한국사회가 추앙하는 신자유주의의 선봉,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사회의 모습과 비슷하여 섬뜩했다. 단, 총과 폭탄이 없어 사건은 덜 하다.)

그렇다면 조커는 단지 상징의 불과하다.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 


본 영화도 이에 대해 다룬다. 조커가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서플렉이라는 인간의 존재는 지워진다. 혁명가( 혹은 테러리스트)들의 편과 정부의 편으로 대립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두개의 반쪽 중 하나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마치 한국의 남북전쟁처럼. 

아서플렉은 없고 여기나 저기나 조커를 원한다. 

혁명가들은 조커를 혁명의 상징으로 세워 그들의 산을 쌓으려하고, 정부는 조커를 테러의 상징으로 세우며 척결하고자 한다. 

정부는 조커의 처형이 이 사회적 테러를 잠재울 수 있다고 곧게 믿는 듯하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에게도 인간의 모습은 지워져 보인다. 이념의 대립이 극심화되는 세상엔 그들만의 판타지와 적에 대한 네거티브만이 존재한다. 이것 또한 한국전쟁, 제국주의, 마르크시즘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말 현실이 그런가? 두 진영 모두 조커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본인들의 판타지를 그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본인을 혁명가라 칭하는 자들은 테러리즘이라는 광기에 휩싸인 것 뿐이다. 그들은 아직 사회시스템의 모순을 간파하고 파고드는 능력이 없다. 단지 왠지 모를 삶의 답답함을 느끼곤 파괴와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사로잡혀있을 뿐이다. 본인을 둘러싼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정부가 조커를 처형하는데 성공시킨다해도 테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조커는 테러의 상징일뿐이지 조커가 그들을 선동하여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배웠듯 사회적 현상이 먼저이고 그에 따른 상징적 인물을 대중이 내세우는 것이다. 한 인물이 그 현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like 히틀러



심지어 조커는 아서플렉이 연기한 배역일뿐이다. 현실에는 아서플렉만이 존재할뿐 조커는 실재하지 않는다. 은행원 3명은 총을 갖고 있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인간을 괴롭혔기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고 그의 어머니와 머레이는 아서플렉을 속이고 모욕했기 때문에 죽었다.

전편에서 일어난 그의 살인은 사실 모두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단지 우연적으로 사회적 메세지가 되어버렸다.

이제 아서플렉은 정체성 혼동을 더욱 심하게 겪는다. 이 세상 모두가 그를 악마적이며 혁명적인 존재 조커로 바라보지만 본인은 여전히 어릴 적 트라우마를 가진 아서플렉이라는 인간이다. 

그의 사랑도 왜곡되어있다. 할리 퀸 또한 연예인 조커를 원한것 뿐 비루한 존재의 인간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서 아서플렉을 버리고 조커를 택한다. 조커로 살아가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므로.

그러나  조커는 그의 진정 내면에서 표출된 것이 아닌 사회적 요구에 의해 연기된 것이다. 따라서 그 지속성은 오래가질 못한다. 그의 변호사이며 정신과 의사가 말하듯 건강하지 못한 모습(지속불가능한 자아)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조커가 진정 그의 모습이었다면 세상이 더 쉽게 멸망해도 아서플렉만큼은 만족스럽게 살아갔을 것이다. 다크나이트의 그 조커처럼.)


그는 파멸한다. 아서플렉을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한 채로.

최근에 읽은 카프카의 소송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자아를 표출하지 못하는 이방인. 그 끝은 파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커를 죽인 사이코패스가 웃으며 본인의 입을 칼로 찢는 것을 보았다. 

다크나이트의 그것. 진짜 조커의 탄생을 목격했다. 과연 또 다른 속편을 만들려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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