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고 달리고 달리면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에게

by gloomee

퇴근길,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충동적으로 신점을 예약했다. 지인에게 몇 번이나 용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얼마 전 신내림을 받았던 무당이 생각났고 가볍게 올해의 운세나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신점을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약간의 불안과 그 보다 조금 많은 기대가 섞인 두근거림이었다. 운 좋게도 곧바로 연락이 왔고 당장 그 주 주말로 일정을 잡았다. 길지 않은 며칠을 보낸 뒤 심호흡을 두어 번 내뱉고 당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온화한 얼굴에 키가 작은 무당 아주머니는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어머니의 병세를 맞췄다. 의심 가득한 마음을 약간이나마 달래 주는 시작이었다. 생년월일과 이름을 밝히자 무당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던 방울을 내려놓고 무당이 해준 말은 이미 대부분 들어봤던 이야기들이었다. 강하게 타고난 신줄, 외강내유의 성격, 결혼은 늦을수록 좋다는 등 새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올해도 여전히 이동수가 있다는 말에 꽂혔다. 타고난 역마살에 새로운 것을 탐하는 성격과 어울리는 예측이었다.


한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같은 동네 안에서지만 이사가 잦았고 10대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서는 지구 반대편 나라로 훌쩍 떠났다. 타지에 있으면서도 늘 벗어나고 싶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다. 그래서 틈만 나면 다른 도시로 도피하듯 여행을 떠났다. 미국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어서 바로 옆 주를 가는 데에도 최소 세 시간 이상이 걸렸고 나는 도착한 여행지 보다 달리고 있는 차 안에 있을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꼈다. 막상 도착하고 나서는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었다. 난 그저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이런 부분이 꼭 닮은 친구를 만났고 우리는 ‘떠나자!’ 한 마디로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 고속도로를 탔다. 우리의 여행은 차 안에서 자꾸 목적지가 바뀌었고 한 시간 거리를 도로에서 빙빙 돌다가 두 시간을 꼬박 채운 후 도착하기도 했다. 뿌리 없는 민들레 홀씨 두 개가 부유하는 모양새였다.


성인이 되고 한국에 귀국해서도 정착은 어려웠다. 월세집을 구하면 1년 계약이 끝나기 무섭게 이사를 하고 직장에서는 같은 업무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다 무작정 이직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근교로 차를 타고 달렸고 긴 휴일이 생기면 비행기에 올라타 낯선 나라로 향했다. 이런 나를 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우려가 가득하다. 떠돌아다니는 내가 불쌍한 걸까?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해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해 보라는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게 정착은 권태롭고 공허하다. 변화가 없는 나날이 이어지면 나는 꺾어놓은 장미처럼 시들어간다. 내게 안정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만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은 약간 서글프다. 각자의 상황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워진다. 나는 밑 빠진 독이라 계속해서 무언가를 퍼부어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주유를 해줘야 한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운전 중에 눈물이 난다.


오늘은 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내일의 출근을 준비해야겠지만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이유 없이 방을 잡아 외박을 할 수도 있고 멀리 떨어진 곳의 친구 집 문을 두드릴 수도 있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 보면 오늘 필요한 양의 여행이 충족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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