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라면

저기압일 때는 라면 앞으로!

by gloomee

누군가 내게 음식을 묻는다면, “밥, 빵, 면,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면이라” 말하겠다. 또, 누군가 내게 면을 묻는다면 “우동, 소바, 라면,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라면이라” 말하겠다. 나는 늘 내 안을 맴도는 허전함을 채울 자극을 찾아다니는데 그중에는 미각의 자극도 포함되어 있다. 국물 라면은 물을 정량보다 적게 넣어 짜게 먹고 볶음 라면은 소스가 면발에 진득하게 녹아들 때까지 끓인다. 라면은 소화되어 사라지지 않고 꾸준한 자극을 퍼뜨려 그대로 세포 안까지 스민다.


오늘의 야식도 역시나 라면이었다. 국물 라면과 볶음 라면 중 고민하다 밤을 함께 할 맥주와는 볶음 라면이 더 어울릴 것 같아 오른손에 쥔 녀석을 저가 있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사실 이건 핑계다. 고민하는 척 하지만 나는 거의 항상 볶음 라면을 고른다. 가장 매운 녀석으로. 매운맛의 볶음 라면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고 매운 음식이라면 환장을 하는 나는 오직 이 라면 하나 때문에 내가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심했다. 친구를 졸라 물 건너온 이 녀석을 처음 맛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자극적일수록 열광하는 내 혀는 첫 입부터 속절없이 매료당해 버렸다. 옆에서 한 젓가락 맛본 (이 한입을 빼앗긴 게 아쉬웠다.) 외국인 친구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음식은 먹으면 기분이 좋아야 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라고 소리쳤지만 그 고통은 그의 사정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나는 방금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라면이 생겼으니까.


매운 라면을 좋아하는 내게 이 세상은 너무 심심하고 담백하다.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하루, 일주일, 한 달을 견뎌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다. 나트륨이 높다는 둥, 영양분이 하나도 없다는 둥 갖가지 이유를 대서 깎아내리지만 옆사람이 한 봉을 끓여냈을 때 한 입을 훔쳐 먹지 않는 사람은 찾기 드물다. 물론 내 인생에 라면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극은 꼭 필요하다. 나라는 사람도, 내가 선사하는 자극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더욱 날것의 단어들을 내뱉고 꾸밈없는 거친 행동을 하고 항상 닿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내 지인 중 하나는 내 집을 방문하는 날이면 꼭 라면 한 봉을 먹고 간다. 자신이 끓이면 그 맛이 안 난다며 꼭 내가 봉지를 뜯게 만든다. 특별한 재료도, 레시피도 필요로 하지 않는 평범한 라면이라도 싱거운 하루가 싱겁게 끝나지 않게 해 준다. 몇 입을 나눠먹으며 우리는 서로에게만 뱉을 수 있는 자극적인 비밀들을 누설한다. 이 비밀들은 아주 맵기도 하고 아주 짜기도 해서 입으로 사라지는 라면과 썩 어울린다. 이 정도는 되어야 무언가 채워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오늘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다 문득 허전함이 몰려와 냄비에 물을 받았다. 비닐을 뜯으니 필요한 모든 재료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 입맛에 꼭 맞게 소스와 물의 양을 조절하자 적당히 맛있는 라면이 탄생했다.


심심했던 위장과 건조했던 하루에 위로를 전하며.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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