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세상은 가끔 위로가 된다.
세상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소음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시끄러운 알람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왁자지껄한 티브이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유난히 감각이 예민한 나는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소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귀마개 대용으로 주변 소리를 차단해 주는 이어폰을 꽂고 방해 금지 모드로 들어간다.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인 것이다.
싱그러운 봄, 활기찬 여름, 알록달록한 가을을 지나 고요한 겨울이 왔다. 세상은 점점 무채색으로 변하고 주변의 소음은 천천히 잦아든다. 아직 단풍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도 기상청에서는 벌써 첫눈을 예고한다. 매년 보는 눈이 뭐 그리 특별하다고 유치하게도 괜스레 마음이 들뜬다. 출근길을 걱정하는 친구의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하얗게 덮인 풍경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런 날이 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 적막한 새벽에 눈이 떠지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너무 일찍 눈이 떠진 탓에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결국 이불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니 밖이 유난히 밝아 테라스로 다가서니 세상을 하얗게 칠하고도 모자란 지, 여전히 흩날리고 있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제설 작업이 아직인지 티 하나 없는 하얀 배경에 와아- 하고 작은 소리로 감탄을 내뱉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얼마간 밖을 내다보다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이런 날이면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 진다. 온수에 넣은 티백이 천천히 우러나며 진한 얼그레이 향이 코끝을 건드린다. 컵에 담긴 차를 반정도 마시고 두꺼운 점퍼를 껴입었다. 백색의 꽃가루가 그치기 전에 아무런 방해 없는 오롯한 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서둘러 문을 나섰다.
고요하다. 밤새 내린 첫눈은 길도, 차도, 소음도, 모두 덮은 듯했다.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요를 사랑하는 나는 소리 없이 한 겹 두 겹 쌓이는 눈을 선호한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이곳엔 나와 눈만이 존재한다. 하얀 풍경을 발로 슬며시 누르자 뽀득-하는 소리가 난다. 밤새 쉬지도 않고 내렸는지 쌓인 눈은 발목을 지나 바지 안까지 들어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런 조용한 세상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다 곧 머릿속의 소음도 지워버렸다. 몸을 기울여 눈을 한 줌 움켜쥐자 체온에 녹아버린 눈들이 엉겨 붙어 작은 얼음 조각을 만들었다. 손 안의 얼음 조각이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하얀색 적막을 귀에 새겨 넣었다. 나와 눈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춥고도 아늑하다. 겨울이 주는 고독한 고요함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