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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Mar 10. 2017

'슈퍼우먼'의 구렁텅이

알파걸에서 슈퍼맘까지, 누구를 위한 이름일까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확신하게 된 건 첫 아이를 낳고 복직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이게 그러니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 일인 거다. 일하면서 아이 키우는 일 말이다. 물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거나, 회사에서 칼퇴가 가능한 부서로 옮긴다거나 하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그런 방법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삶의 질이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정말 이런 것일까? 그 질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게 문제였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변명에 인생을 맡길 수는 없지 않나 싶었다.


대단한 삶을 원했던 건 아니다. 그저 일과시간에 일터에서 열심히 내 일을 하고, 일과 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혜안과 실력을 갖춘 기자가 되길 소망했고, 아이가 자라는 매 과정을 함께 하는 친구 같은 부모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이 사실상 '대단한' 축에 속하는 일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일과시간은 너무 길어서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함께할 시간을 허락지 않았다. 누군가의 조력 없이, 순전히 부모(라 쓰고 엄마라 읽는다)의 힘과 노력만으로, 일과 육아 모두를 만족스럽게 해내며 사는 것이 실제로는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모두를 해내는 사람을 '슈퍼우먼'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잘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해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점이다. 일과 육아 모두를 해내는 일에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절로 '슈퍼우먼'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내내, 이 말의 숨겨진 함정에 대해 말해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슈퍼우먼으로 자라는 알파걸들


학창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된 후까지도 여성에게 '슈퍼우먼'이라고 부르는 말이 결국은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 무슨 역할이 주어져도 씩씩하고 용감하게 척척 해결하는 히로인(Heroine). 슈퍼우먼이란 사회가 통상적으로 부여하는 여성성과 연결되기보다 성취, 성공, 도전처럼 '사회적 남성성'의 단어들과 이어지는 말이다. 성취지향적인 사회에서 긍정적 남성성은 곧 찬사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내 또래 여성들에게, 슈퍼우먼이라는 용어가 여성의 진취성을 고무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군다나 1981년생인 나는 슈퍼우먼 류의 여성성을 체화한 세대다. 2006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댄 킨들러 교수는 저서 <알파걸,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발표하며 '알파걸'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북미지역의 재능 있고 우수한 리더 10대 여성 113명을 인터뷰했고, 이전 세대에 비해 좀 더 유능하고 사회적 리더십을 갖춘 엘리트로 자라나고 있는 10대 여성을 알파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유행하던 당시 나는 20대가 되었지만, 알파걸이란 말은 내 10대 시절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였다.


학창 시절의 나는 공부를 곧잘 했고, 학급 반장도 연이어 맡았다. 학교 대표 육상 선수로 활동했으며, 장래희망은 기자 혹은 변호사라고 적었다. 대학에 가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고, 학생회장으로도 일했다. 학교 때 한 번도 남학생들로부터 실력이나 근성 면에서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여중, 여고를 다녀 이 시기를 예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한 결과, 대체로 열패감보다 성취감을 맛보며 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몰랐다. 학교가 그저 사회생활을 연습하기 위한 가상의 공간이기에 그간의 성취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그 이후에도 잘 알진 못했다. 여성에게 실재하는 차별과 배제의 틀이 우리를 얼마나 옥죄는 것인지를. 졸업을 앞두고 한 지방 방송국 공채의 최종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이유 중 하나가 "어차피 해당 지역 출신 남자를 뽑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을 들었을 때도, 기자가 된 후 "여기자는 취재원들이 잘 기억해줘서 좋겠다"는 남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편견을 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여건에서라도 상황을 통찰하기 위해 애쓰고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 길이 생긴다고 믿었다. 실제로도 계속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출처 : https://pixabay.com


하지만 돌아보면 단지 운이 따른 덕분이었다. 이 사회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질서에 의해 작동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에 순응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것일 뿐인데, 마치 그것이 개인의 역량에 의한 성취 인양 치켜세워주는 사회의 사탕발림에 설득당해온 것이다. 그러면서 애초부터 남성 위주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인 여성들의 입장은 이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그저 혼자서 열심히 모범생으로만 달려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슈퍼우먼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슈퍼우먼이기를 거부하다


당당하던 슈퍼우먼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더 이상 슈퍼우먼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다. 도전과 성취라는 긍정적 남성성의 이름을 빌렸을 뿐, 슈퍼우먼의 현실은 그리 멋지거나 보람차지 않았다. 직장과 가정은 성취와 돌봄으로 대표되는, 지극히 상충되는 성역할을 요구하며 엄마들을 혼란에 빠트리며 역량 이상의 노동을 강요하고 혹사했다. 사회 시스템은 여성의 과도한 노동을 보완해주지 않았다. 사회 분위기 역시 "으레 그런 것"이라며 눙칠 뿐이었다. 보상은 오직 '슈퍼우먼'이라는 공허한 수사가 들이미는 내면의 정신승리뿐이었다. 일과 육아에 지쳐 집에 돌아온 엄마가 "나는 불꽃"이라며 머리를 질끈 묶는 어느 오그라드는 광고처럼 말이다.


얼마 전, 대학 때 친구를 만났다. 두 아이를 키우며 대기업에 다니는 워킹맘인 그는 대학 시절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필기를 하는 그의 노트는 동기들에게 제2의 교재나 다름없었다. 교우 관계도 좋아서 모두 그를 통해 새로운 소식을 들을 정도로 마당발이었다. 학과 성적이나 영어 성적도 훌륭해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손쉽게 합격했다. 그러나 빛나던 친구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긴 어려웠다. 매일같이 야근하는 남편 대신 '칼퇴'하고 두 아이를 거의 혼자 돌보다시피 하는 일상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 일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대화의 주축이었다. 내 주변에서 가장 슈퍼우먼인 그는 더 이상 씩씩하고 빛나는 히로인이 아니라, 삶에서 자신이라는 주인공을 가장 뒤로 젖혀둔 채 살고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또 어떤가. 나는 내게 요구되는 모든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던 일을 포기하고 살고 있다. 알파걸에서 슈퍼우먼으로 성장해 세상이 진보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라고 평생 동안 독려하던 사회는 내가 더 이상 사회적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데 조금도 말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사실은 이 사회에서 큰 쓸모가 없는 존재였음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배신감이 밀려왔다. 이제 나는 슈퍼우먼이라는 말이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성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 동원한 상징조작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슈퍼우먼으로 살라고 희망 고문하는 사회에서 나이 서른 중반을 넘겼다. 이쯤 되니 지칠 대로 지친 수많은 슈퍼우먼들이 주변에 차고 넘친다. 그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포기한 상태다. 일을 포기했거나, 결혼(혹은 사랑)을 포기했거나, 아이를 포기했거나, 자신의 시간을 포기했다. 원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희망하다가, 무엇이든 한 가지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참 잔인하다. 무엇이 여성의 삶을 이렇게 숭숭 구멍 뚫린 누더기로 만드는 것인가? 언제까지 여성의 인생을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최후의 방패막이로 삼을 것인가? 공정한 룰대로 경쟁하라고 가르쳐놓고 막상 현실 세계로 진입하면 정글 같은 남성적 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제 나는 슈퍼우먼이길 거부하기로 했다.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내라고 부추기는 사회의 강요에 허덕대다 결국엔 무언가를 포기해 한 구석이 결핍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모든 것 가운데 무언가를 포기하는 네거티브의 삶이 아니라, 많은 것 중 선별해 선택하는 포지티브의 삶이라고 관점을 고치기로 했다. 이것이 또 다른 차원의 정신승리일 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관점의 전환이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내 딸에게 슈퍼우먼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을 다 이루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해줄 것이다. 행복을 찾는 비법을 터득해서 성큼성큼 걸어가라고 가르칠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모순된 사회 구조에 대해 비판하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오롯이 너 자신으로 살라고 응원할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대선 공약 1호는 바로 '슈퍼우먼 방지법'이다. 그의 지지율이 1~2%대에 머무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슈퍼우먼의 역할을 거부하고, 질문을 던지며, 더 나은 변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이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렇게 세상이 조금이나마 진보하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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