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과 자아, 사회적 활동에 대하여
1년이다.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학교든 직장이든, 조직에 소속된 상태로 '사회생활'을 하는 게 당연했던 내게, 지난 1년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고 싶어서 사표를 썼기에 일상은 만족스러웠지만, 정작 내 인생은 도태되고 소외되는 것 같아 불안하고 우울했다. 이 선택으로 인한 내 안의 양가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내 인생의 균형을 찾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 안테나를 곧추세웠다.
처음 몇 달간은 기회가 없었다. 낮 시간에는 아이를 키우는 게 내 주된 역할이기에, 일을 한다면 아이들이 잠든 야간에 짬짬이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나는 기관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을 하루 24시간 돌보아야 하기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일해서 결과물을 '납품'하는 방식의 일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단순하거나 상업적이기만 한 일은 싫었다.
여건도 자유롭지 않은데 입맛은 까다롭다 보니, 적절한 일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당연히 취업 시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제 경단녀가 돼서 인생 종 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몇 년 전 사표를 쓰고 유학을 다녀온 회사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은 하고 싶은데 마땅한 일이 없어 괴로워한다는 내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선배는 “같이 일해보자”는 고마운 제안을 했다. 그런데 더 고마운 것은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내 여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해준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재택으로, 온라인으로 진행하도록 해주었다. 내가 바라던 대로,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혼자 집중해 일하고 결과물을 전송하면 되는 일이었다.
선배와는 사회부 사건팀에서 함께 일했다. 저널리즘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던 선배는 ‘가짜 뉴스’가 미국 사회를 뒤흔드는 현상과 가짜 뉴스의 팩트를 점검하는 ‘팩트체크’ 미디어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한국에 돌아와서 팩트체크 전문 미디어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나는 가짜 뉴스, 혹은 사실 관계가 불분명한 뉴스의 팩트를 체크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트업’의 일원이 된 셈이다.
일의 방식은 신선했다. 모든 것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주 2회 진행하는 팀 회의도 온라인 회의 플랫폼을 통했다. 기사 아이템 선정과 작성, 전송, 피드백, 에디팅 등 모든 과정도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2달여의 회사 설립 과정에서 선배를 비롯해 회사 구성원들과 얼굴을 마주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서로와 일에 대한 신뢰관계가 이미 형성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의 노동 환경에 대해 생각했다. 정시에 출근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며 회의를 하고, 상사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고, 결재 라인을 거치는 동안 대기하고, 회식을 하며 사내 정치에 신경 쓴다. 이런 노동의 과정에는 느슨하고 비생산적이며 소모적인 시간이 많이 포함된다. 일은 집약적으로 하고 일하는 환경은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늘 형식에 얽매여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한국의 노동 문화에 대해 불만이었다.
반면 육아는 시간의 낭비를 필요로 한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별 목적이 없다. 대화는 뚜렷한 질문과 명확한 답변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무언가 당장 해결할 과제도 없다.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듯한 시간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결과적으로는 낭비가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들을 양분 삼아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성장한다. 세상 어떤 일보다도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부모에게 아이와 함께 하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지 않는다. 사회적 노동에 과도하게 시간을 집중하느라 사적인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미디어 스타트업에 합류해 유연하게 일을 하면서, 회사 생활을 할 때에나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겪었던 삶의 불균형이 조금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 스마트한 인프라가 넘쳐나는 세상인데, 이런 환경을 십분 활용해서 업무 집약적이되 성과 중심인, 개인의 여건이 존중되는 노동 환경이 보편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더 이상 엄마들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지 않고, 꾸준히 일을 하고 돈도 벌며 경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노동 시간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개인이 배려받을 수 있는 유연한 노동 환경이 우리의 미래가 아닐까?
이와 별개로, 또 하나 내게는 가슴 뛰는 일이 하나 생겼다. 브런치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엄마 정치’ 모임의 결과물이다. 지난 4월 22일 첫 모임을 시작한 엄마들은 불과 두 달도 안 된 지난 6월 11일,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을 창립했다. 엄마들은 아이를 낳고 겪은 사회의 각종 불합리와 모순에 대항하고 엄마의 시선으로 이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기 위해 ‘정치 행동’이라는 적극적 방법을 취하자고 합의했다.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뿐만 아니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다양한 돌봄 주체가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정의했다.
무엇보다 이 단체의 일은 너무도 재미있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 엄마가 된 후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그것이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실질적 해결 방식을 찾기 위해 시선을 사회로 확장하는 일 역시 ‘각성’과 ‘학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단체에는 나와 같은 과정을 겪고 같은 입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입장. 설 립(立) 자에 마당 장(場). 서 있는 마당, 즉 처한 자리와 상황이 똑같다는 뜻이다. 서로의 일이 마치 내 일처럼 여겨지고, 상대방의 상황이 안타까워 내가 먼저 나서서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가장 최고의 상황은 바로 같은 입장에 서보는 일일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온전히 ‘나’로서만 살아오던 사람들이 아이의 입장을 이해하고,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는 일인 것 같다.
그런 엄마들이 모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로했다. 엄마라는 입장은 세상 대부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을 키우게 한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의 엄마라면 어떨까’라는 가정이 항상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의 문제 인식은 단순히 내 아이를 넘어, 세상의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질서로부터 소외되는 존재를 보듬고,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세상의 질서를 고쳐 새로 만들자는 동의가 가능했다.
엄마들은 육아와 일로 바쁜 틈에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어 함께 한다. 아이들이 잠든 밤 시간이 되면 온라인 단체 채팅방은 불이 난다. 이곳에서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겪은 자신의 개인 경험담은 물론,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사회 문제에 대한 격렬한 토론도 이뤄진다. 기자회견이나 직접적인 행동, 단체의 행사 등 ‘일거리’가 생기면 스스로 자원해서 일을 도맡는다. 기존 조직에서 흔히 보아온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상향식 의견 수렴 구조다. 아주 민주적이고 창의적이며 생산적이다. 이런 과정 자체가 너무 놀랍고,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즐겁다.
퇴사 후 1년, 내게 벌어지고 있는 설레는 변화들은 내 삶을 바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변화를 견인하고 있는 ‘일’의 방식 또한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의 나는 당장 달성 가능한 목표에 집중하느라 스스로 나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내 콤플렉스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둘씩 깨지는 과정이 내게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리고 또다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그 가능성을 붙잡는 것은 결국 자신의 힘이다. 엄마가 된 내 자신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