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노동의 가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0여 년간 살아오면서, 밥하는 게 나의 일이 될 줄 몰랐다. 밥은 항상 엄마가 차려주는 것이었고, 식당에서 사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일은 그저 공부를 하거나,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다. 왜 몰랐을까. 사람이 먹고살려면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그 돈으로 쌀을 사야 하고 또 그 쌀로 밥을 지어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누군가는 그 밥을 짓고 차려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도 언젠가 엄마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엄마로서의 삶은 미리 앞당겨 실감할 수 없는 경험이다. 때문에 나는 엄마가 되기 이전엔 단 한 번도 '밥하는 아줌마'로서의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밥하는 노동에 대해 생색을 낸 적이 없었다. 으레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늘 최선을 다했다. 어리석은 딸은 머리로만 엄마가 고마웠다. 엄마가 해주는 밥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엄마가 되면 하루 종일 아이들을 쫓아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삼시 세끼 먹이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시간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실들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체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후부터 나는 '밥하는 아줌마'로서의 내 정체성을 깨달았다. 둘째 아이가 이유식을 할 때는 이유식 따로, 첫째 아이 반찬 따로, 어른 반찬 따로 만들어 내느라 쉴 새 없이 바빴다. 둘째 아이까지 어른과 함께 밥을 먹게 되었어도 늘 아이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때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거나 냉동음식을 조리해 먹기도 했지만, 그 선택과 결정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일 역시 밥하는 노동의 일환이었다.
시간을 따로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하고 설거지를 3회씩 하는 데에 하루 24시간 중 최소 3~4시간은 족히 소요되는 것 같다. 그 일들은 몸이 무거운 육체노동인 동시에, 각종 스트레스를 수반하는 정신노동이었다. 때문에 이 땅의 엄마들에게 가장 맛있는 밥이란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이며, 가장 싫은 말이 "집에서 간단히 차려먹자"인 이유를 뼈 속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최근 이언주 의원(경기 광명시을,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이 학교 비정규직 급식노동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급식소에서 밥하는 아줌마들"이라고 발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미친 X"라는 저속한 표현도 했다. 나는 이 의원의 발언을 보며 속이 쓰렸다. 그가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중 얼마나 가사 노동에 매진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밥하는' 존재로 여겨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평소 가사 노동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임은 알겠다.
그의 실언은 우리 사회의 우울하지만 엄연한 현실을 끄집어낸다. 바로 가사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의 천박한 인식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직책과 직위를 가진 사람이라도, 밤이면 집에 돌아가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새 옷을 갈아 입고 다시 사회로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군가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만약 누군가의 노동 없이 가정에서도 그 모든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원활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사회 활동은 타인의 가사 노동 비용이 투자된 재투자 행위라고 봐야 한다. '밥하는 아줌마' 없이는 성공한 사업가나 훌륭한 학자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가사 노동은 사회경제적 가치, 즉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림자 취급을 받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최근 직업으로서의 전문 가사도우미가 많아지고 요리, 청소, 빨래 등 가사 노동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생기면서, 가사 노동에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 하지만 시장은 가사 노동의 가격을 가장 저렴한 하위 계급의 노동으로 산정한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꼭 돈으로 환산해야 하는 것일까?모든 노동은 돈으로 대체되어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삶의 질은 단순히 돈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소진되기만 하는 사회적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에게, 느긋하게 식사할 수 있는 따뜻한 요리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정돈된 공간은 삶의 질을 드높인다. 가사 노동을 제공받는 이는 내면적으로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충족을 얻는다. 충분한 휴식과 충전을 한 사람은 그 에너지를 토대로 다시 사회적 노동의 자리로 돌아가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휴식이나 재충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척도가 없다. 어쩌면 돈이 모든 가치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삶의 질을 보장하는 가사 노동이 이토록 폄하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비극은 이런 것이다. 국회의원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되려면, 본인은 '밥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이에게 맡겨둔 채 바깥일에만 몰두하고 성과에 집착해야 하는 현실 말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대인 40~50대, 특히 여성의 경우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선 가정의 일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 위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가정에만 머물러야 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2011년 경향신문에서 진행했던 여성 강연 프로젝트 '알파레이디 리더십'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40~50대 선배 세대 여성들이 멘토로서 강연에 나섰다. 강연자들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 남성 동료들과 경쟁해 이기는 방법, 조직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팁 등 사회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줬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일과 가정생활을 균형감 있게 병행하는 노하우는 들을 수 없었던 게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선배 세대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여러분 친정엄마, 시어머니, 아니면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서라도 육아와 가사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회사에서는 집안 일에 쿨한 모습을 보이세요. 그래서 살아남으셔야 해요."
그렇게 살아남은 성공한 선배 여성, 그중에서도 이 의원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화려한 성공 뒤에 자신을 위해 희생한 가사 노동 대체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나는 가사 노동보다 우월한 사회적 노동을 하는 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삐뚤어진 자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의원의 발언이 불편한 이유다.
물론 대부분의 성공한 여성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희생한 가사 노동 대체자에게 감사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 고마운 마음은 대부분 자신을 대신해 가사와 돌봄 노동을 담당해준 또 다른 여성, 주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귀결된다. 마음의 빚은 고통을 낳고,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은 쌓여간다. 이런 일들은 비단 선배 세대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사 노동의 의무를 갓 짊어지기 시작한 30~40대 여성들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사 노동은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일이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 일을 저평가하고 보이지 않는 뒷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역할의 이름표에는 비열하게도 여성의 이름을 밀어 넣는다. "설거지는 하늘이 정해준 여자의 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가 아무렇지 않게 공당의 대표가 되는 사회다. 후져도 너무 후지지 않은가.
가사 노동의 굴레를 여성에게 씌운 대가로, 우리는 사회에서 가정이란 존재를 싹 지운 채 성취에만 매달린 '일하는 기계'로 산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매기고, 모두가 골고루 공평하게 가사 노동을 나눠하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밤 늦게까지 회사 일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면 우리 삶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가사 노동이 가족의 즐거운 노동이 되고, 가족은 모여서 무언가를 늘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사회는 마치 모두가 불행해지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곳 같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재정의하는 일이 이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