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은 '벌레'가 되고 싶지 않다
지난주에 친정아버지 제사 때문에 KTX를 타고 다녀왔다. 기차 타기에 앞서 머릿 속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2시간 동안 이동하는 일이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5살, 3살짜리 아이들이 과연 얌전하고 조용히 잘 버텨줄 것인가.
그동안 친정에 갈 때마다 장시간 운전을 하더라도 자가용을 이용했다. 사적 공간이 확보되고, 타인에게 피해줄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이 일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다. 나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해서 4~5시간이 걸리는 차로는 안전상 무리였다. 대안으론 기차가 가장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내려갈 때는 기차에 타자마자 두 아이 모두 낮잠에 빠져들어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기차에서였다. 아이들의 눈이 말똥말똥했다.
이미 단단히 마음먹고 각종 장난감과 그림 도구, 불량식품까지 가방이 터지도록 잔뜩 챙긴 터였다. 나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아이들이 놀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시끄럽게 떠들지 않도록, 돌아다니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애썼다. 5분에 한 번 꼴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 것 같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으니까 장난치면 안 돼.", "기차에서는 돌아다니면 안 돼."
웬일로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얌전하고 조용했다. 큰 소리를 내거나 울지도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간식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었다. 나는 속으로 '이 정도면 대박!'이라 외쳤다. 앞자리 옆자리 승객들 모두 자거나 우리 아이들이 귀엽다며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내릴 때쯤 반전이 벌어졌다. 우리 자리와 먼 곳에 앉았던 한 20대 남성이 다가오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기차에서는 아이들 좀 조용히 시키세욧!!!"
아이는 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설쳐대는 존재다. 끊임없이 묻고, 요구하고, 칭얼거린다. 아이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려면 자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할 때 마음대로 재울 수 있다면 그건 아이가 아니라 인형일 것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지 않거나 키우는 것을 가까이에서 본 경험이 없다면, 아이를 온전히 컨트롤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나도 안다. 그래서 최대한 노력했다. 2시간 내내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노심초사했다. 객관적으로 타인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 했는데도 '맘충' 취급을 받고 나니 억울함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툭 던지고 가버린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아이들을 단속하기 위한 엄마의 노력을 지켜본 주변 승객들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저 멀리서 불규칙하게 들리는 아이의 소음만 들었던 그 사람은 나를 짜증스러운 무개념 엄마로 대했다. 우리보다 더 시끄러운 아줌마, 아저씨도 있었는데. 객실 내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만 뭘 그렇게 피해를 줬을까. 똘망똘망 뜬 눈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아이들을 보니 서글퍼졌다. 아이들을 데리고는 아예 공공장소에 나오지 말라는 말인가. 세상이 뭐 이리 각박한 걸까.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고, 우리가 뭐 그리 시끄러웠느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억울한 눈빛으로 그 사람의 뒤꽁무니만 쳐다봤다.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이 나와 같은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또 선택하고 싶은 방법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어느새 '맘충'이 되어버리는 걸까? 하긴, 그렇다고 그 누구도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모두들 그 상황을 관망했다. 나는 침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 사람처럼 나에게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저 참은 것뿐일까? 그 사람이 과민했다 생각하지만 괜한 오지랖을 부리기 싫었을까? 사람들은 대체, 공공장소에 나온 아이들과 엄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근 아이를 동반하면 아예 입장이 불가한 '노 키즈 존'이 늘고 있다. 물론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이가 타인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데도 사과나 양해의 말 한마디 없이 방관하는 부모들도 있다. '맘충'이란 말이 등장한 맥락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모든 아이와 엄마가 공공에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주변에 피해를 줄까 항상 긴장감을 유지한다. 아이들이 위험한 존재는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노 키즈 존이니 맘충이니 하는 용어는 모든 아이와 엄마들을 '민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혐오의 틀 안으로 가둔다. 사회에서 그 혐오의 틀이 공고해질수록, 사람들이 그 틀을 당연시할수록, 아이와 엄마들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지레 겁을 먹은 엄마들은 아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낸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하는 분위기가 점점 심해진다. 한 엄마는 인터넷에 아예 '그냥 맘충 되려구요'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그동안 맘충이라는 단어가 너무 신경 쓰였는데, 이제 놓기로 했다"며 "남들 눈치를 보다 내가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 역시 외식하러 잘 나가지도 않지만, 아이들과 밖에서 밥을 먹는다면 키즈 체어를 마련하고 있는 대형 식당만 찾아간다. 적어도 아이들을 손님으로 인정은 해주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백화점이나 대형몰, 할인마트를 좀비처럼 배회하며 '몰링(Malling)'하는 이유는 쇼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엄마나 아이나, 그나마 '소비하는 존재'일 때 인간적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다. 슬픈 일이다.
얼마 전 노 키즈 존 식당에서 입장을 거절당한 엄마가 억울함을 담아 쓴 글에 달린 비난의 댓글들을 보았다. 논리는 크게 두 갈래였다. '식당을 이용하는 다른 (애 안 딸린) 손님의 권리도 있다', '식당 영업을 하는 자영업자의 권리도 있다'. 당연한 말이다. 누구에게나 쾌적하고 평온한 시공간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와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자영업자들도 자유롭게 영업을 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쉽다. 일단 아이들을 데리고 간 엄마들이 공공질서를 더 잘 지키는 게 우선일 것이고, 다른 성인 손님들도 아이를 동반한 부모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아량을 가지면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서로 배려하고 공존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식당 주인도 굳이 손님을 쫓아낼 필요가 없어진다. 어른들이 잘 하면 된다.
하지만 이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는 순진함이다. 엄마들은 아무리 애써도 존재 자체가 민폐인 맘충으로 낙인찍혀있고, 어른들은 자신의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자유롭게 영업할 권리가 침범당하는 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 갈등은 좀처럼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 갈등의 주된 원인으로 '아이'들을 지목한다. 그리고 공공의 공간에서 아이들을 쫓아냄으로써 답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쫓아내야 하는 존재는 왜 꼭 아이들이 되어야 할까?
누군가 내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라며 다른 누군가의 페이스북 글을 소개했다. '노아재존'. 이건 무슨 사자성어가 아니다. 노 키즈 존에 빗대 만든 용어인 'No 아재 Zone'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는 공공장소에서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거나 소란스럽게 할 경우 소음의 크기, 행패를 부릴 경우 타인이 느끼게 될 두려움 및 불쾌함의 크기 등을 비교했을 때 단연코 '아이'보다 '아재'의 위험성이 더 크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왜 '노 아재 존'은 없느냐. 글쓴이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입장을 거부하거나 퇴장을 요청할 경우 아재들의 사후보복 및 행패가 더 두렵기 때문'이라고. 재미있는 글이 아니라 사실은 무서운 글이었던 셈이다.
배제와 소외의 장벽이 상대적 약자인 아이들, 그리고 그 보호자인 엄마들을 대상으로 쌓아 올려진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약자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일이 사회의 당연한 룰이 되어가는 이 사회에서 언젠가 노 장애인 존, 노 이주노동자 존, 노 노인 존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민폐'로 규정하며 자신의 쾌적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온전히 평온하고 쾌적할 수 있을까?
작가 은유 씨는 최근 한겨레신문의 '노 키즈 존은 없다'는 칼럼에서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라고 말했다. 인간 사회에는 민폐를 끼치는 약자가 강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자는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동의 아래 대략의 룰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한 때 어린아이로서 약자였고,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 또다시 약자가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하며 살아간다. 강자가 약자를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 곳은 사회가 아니라 정글이다. 어릴 때부터 배제와 소외의 경험을 착실히 쌓아온 아이들이 어른이 된 사회는 어떨까? 아이들을 쫓아내던 어른들은 노인이 되어 자신이 쫓아냈던 아이들로부터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노 키즈 존이 늘어나고 엄마를 혐오하는 용어가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은 분명,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신호다.
요즘 우리 가족은 외식할 일이 있으면 동네에 자주 가는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을 찾아간다. 푸근한 주인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밥상이 맛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식당 주인이건 손님이건 그곳에 오는 어른들이 모두 편안하고 친절하게 아이들을 대해준다. 마음이 편안하니 밥도 느긋하게 잘 들어가고 소화도 잘 된다. 인간 사회에서 따뜻한 배려를 주고받으며 인간답게 한 끼를 먹은 든든한 기분이 든다. 맘충, 노 키즈존을 바라보는 괴로움은 바로 이런 온정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우리, 보다 인간적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