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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May 11. 2017

새 대통령에게 바랍니다

사표 쓴 엄마가 바라는 새로운 사회

투표장에 들어설 때까지도 누구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인증샷이 줄줄이 올라오는데, 투표를 마친 사람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내 마음속은 두 후보 사이에서 갈팡질팡이었다. 15년 투표 경력 가운데, 이렇게까지 고뇌한 선거는 처음이었다. 뽑고 싶은 사람이 여럿이라니 감사한 일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괴롭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곪을 대로 곪은 대한민국의 썩은 환부가 일부 도려내 지긴 했지만, 이번 대선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각종 적폐들을 뿌리 뽑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 무력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때문에 다음 대통령은 압도적인 개혁 동력을 갖고 당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세 후보의 개혁성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족스러웠다. 더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내 표를 주었다간 압도적 동력에는 힘이 덜 실린다.


또 하나 더. 엄마가 된 후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엄마인 여성, 혹은 잠재적으로 엄마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을 착취하고 이용함으로써 굴러간다. 이 못돼 처먹은 구조와 질서에 제동을 걸고 여성의 삶을 구원할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후보는 누구인가? 대세 후보의 양성평등 감수성이 다소 아쉬웠지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한 다른 후보는 너무 약세였다. 내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이야 미미하겠으나, 이번 투표에 임하는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어려운 선택이었다.


내게 투표가 절실했던 이유


투표소에 남편, 두 아이와 함께 갔다. 투표소에 온 가족이 출동하는 건 지난 총선 이후 두 번째다. 젊은 부부와 어린 두 아이, 단란한 4인 가족. 우리 사회가 흔히 '표준'으로 상정하고 있는,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정의 모습이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아내는 주부로서 가사를 하고 아이들을 키운다. 두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마 품에서 (지지고 볶으며) 지낸다. 핵가족화된 사회에서 최대한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한 가족 형태다.


결혼 전만 해도 이런 형태의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부부가 각자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감 있게 살길 바랐고, 그런 바람은 신혼 때만 해도 현실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 뒤부터는 모든 질서가 헝클어졌다.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달랐다. 각자 일도 하고 가정도 돌보려던 계획과 달리, 한 사람은 일을 하고 한 사람은 가정을 돌보는 것이 낫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부부가 각각 일과 가정에 고루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는 커리어를 포기한 채 세상의 벽을 체감하며 살고, 남편은 외벌이로서 그 무게를 견디며 세상과 싸운다.


물론 우리 부부의 인생이 이렇게 변한 이유로는 개인의 선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 원인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가로막는 사회 구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속 자본이 충분치 않은 대다 평범한 노동자들의 경우, 가정을 운영하는 방식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부부 모두 일을 하지만 노동의 대가는 짜고 노동시간은 길다. 양육은 고용된 제2의 노동자 몫이 되고, 가정 내 자본은 축적되지 못한다. 삶의 질은 떨어지고 육아의 질도 떨어진다. 어차피 축적 안 되는 자본, 삶과 육아의 질이라도 끌어올려보고자 부부 중 한 명은 일을 그만둔다. 대체로 급여 수준이 낮은 여성이 사표를 쓴다.


단란해 보이는 '표준' 4인 가족의 속내는 이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가족의 형태가 행복한 가정의 전형인 양, 포장하고 설득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열한가? 나는 사회에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투표를 해야 했다. 최대한 신중하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센 일이었기 때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랍니다


인수위 없이 선거 다음 날 바로 출발하는 새 대통령은 몹시 분주할 것이다. 여전히 이념으로 분열된 사회의 갈등을 봉합해야 하고, 선거 기간 동안 무수히 외쳤던 적폐들을 청산해야 한다. 경제와 일자리를 챙겨야 하며 대북 문제와 외교, 안보도 살펴야 한다. 국민과 소통하며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바로 잡고 가다듬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출처 : 문재인 공식 블로그


하지만 내가 절실하게 투표했던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취임사를 읽다 보니 다소 서운한 마음이 들긴 한다. 물론 취임사에서 빠진 이슈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게 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이전부터 새 대통령의 대선 공약 가운데 여성 및 보육 관련 정책을 살펴보다가 문제의 근원에 좀 더 다가갔으면 싶었던 바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가장 차별받는 최약자인 게 사실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이의는 없지만, 여성의 일자리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이전에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고용 우수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보다는 양성평등 원칙을 강제화하고 이를 어기는 기업에 페널티를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또 육아는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양육자가 책임질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엄마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 임금 삭감 없이 의무적으로 육아휴직과 유연근무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면 좋겠다.


공고한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와 체질을 개선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기업의 저항이나 성 대결 양상의 갈등이 심화될 우려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이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다뤄주기를 바란다. 젊은 청년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며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현실은 여느 이슈들과 비교해도 결코 중요도가 낮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건 국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개개인이 빠르게 체감할 수 있는 이슈다.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 본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모두의 문제다.


새 대통령의 임기 중에, 나와 내 이웃의 삶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졌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적어도,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절망 속에서만 살아왔다. 응원합니다. 새 대통령. 참, 내 표의 행방은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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