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약자 우선주차장'은 어떨까?
운전 경력 17년. 나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운전에도 꽤 자신이 있다. 한때 취미로 레이싱을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밤늦게 올림픽대로를 빠르게 달리면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간다. 그렇다고 무조건 달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크고 작은 접촉사고를 겪으면서 최고의 운전은 '방어 운전'임을 터득하게 됐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여자치고는 운전을 잘 하네?"
불쾌한 칭찬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가 운전을 잘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높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다는 그럴듯한 근거도 거론된다. 물론 내 주변에도 운전 '공포증'을 가진 여성이 많긴 하다. 특히 최대 난제는 주차라고 한다. 주차가 어려워 운전을 못 하겠다는 여성도 여럿 봤다. 그렇다면 정말 여성은 남성에 비해 운전을 못하도록 타고 났을까?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사실일까?
동의하지 않는다. 길도 잘 찾고, 운전도 잘 하는 여성도 많이 봤다. 2016년 9월 미국에서는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연구 결과가 심리과학 학술지(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됐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UC Santa Barbara)의 연구자 마거릿 타람피(Margaret R. Tarampi)는 "(그동안) 공간 사고를 특정할 때 여성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제껏 여성에게 불리하고 남성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인지 기술 능력을 테스트해왔기에 여성이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이 열등한 영역'이라는 편견은 여성의 테스트 결과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한다. 실제로 성별이라는 변수가 공간 지각 능력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지 않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편견은 공고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의 운전 능력에 대한 편견이 제도의 틀 안에서 규정되기도 했다. 2009년 서울시는 여성우선주차장 설치 기준 조례를 만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여성이 겪는 주차의 어려움, 범죄 노출의 위험을 해결하고자 여성우선주차장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는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한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女幸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서울특별시 주차장 설치 및 관리 조례 제25조의 2에 의하면, 주차대수 30대 이상인 주차장의 경우 여성이 우선하여 사용하는 주차구획을 10% 이상 설치해야 한다.
당시 여성우선주차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여성우선주차장의 도입 취지나 이용대상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오히려 범행의 표적 장소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는 잠재되어 있다. 나 역시 비슷한 의문을 가졌다. 지자체가 나서서 여성의 운전능력을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꼴이 아닐까? 이용대상을 성별 구분 없이 유아를 동반한 운전자, 임산부 등 배려가 필요한 운전자로 명시하면 안 될까? 그렇다면 굳이 여성우선주차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까?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우선주차장의 이용대상이 여성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주차계획과는 "여성우선주차장은 임산부를 포함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운전자를 포함하여 유아 동반 운전자를 우선 배려하는 주차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차별이 아닌, 교통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주차 문화의 하나"라는 양성평등 감수성이 녹아 있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용대상에 대한 규정이 조례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을 줄 여지가 있고, 도입 초기에 "운전이 어려운 여성을 위한 제도"라는 성차별적 취지를 워낙 강조해서 이미 편견을 가진 이용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 다시 의문이 들었다. 여성우선주차장의 이용대상을 서울시의 설명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례를 통해 명시되지 않고 제대로 홍보되지도 않는데 이용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특히 '여성 우선'이란 용어 때문에 여성에게만 편의를 제공한다고 이해되지 않을까? 여성우선주차장을 상징하는 분홍색 주차선과 치마 입은 여성 심벌은 그런 오해를 더욱 명료하게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
페인트칠만 분홍색으로 한 여성우선주차장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갈등과 논란을 부추긴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 공동체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가두며 우리 안의 '여성 혐오'를 불러낸다. 한때 유행했던, 운전에 미숙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아줌마에 대한 우스갯소리 '김여사' 시리즈는 아직도 여성우선주차장과 한 세트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인식이 왜곡된 형태로 자리 잡아서, 오류를 바로 잡아 고치려면 상당히 많은 사회경제적 비용이 들 것이다. 당시 재선을 앞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양성평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치적으로 내세운 전시 행정의 비극적인 결과가 이런 것인가 싶다.
그렇다고 실효적일까? MBC <무한도전> 국민의회 특집에서는 한 임산부가 '임산부 주차 편리법'을 제안했다. 좁은 주차구역에 차를 대면 타고 내리다가 배가 긁히거나 아예 승하차가 불가능한 경우도 생긴다는 경험담도 소개했다. 여성우선주차장이 있긴 하지만 일반 주차구역과 면적이 다르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출연자는 임산부도 장애인 주차구역을 이용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시 조례에는 일반 주차구역에 비해 공간이 넓은 확장형 여성우선주차장 설치 기준에 대한 규정이 매우 소극적으로 정해져 있다.
나 역시 임산부 때 배가 불러오면서, 또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할 때마다 더 넓은 주차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성우선주차장은 있으나마나 할 정도로 편의성이 떨어졌기에, 장애인 주차구역 처럼 면적을 넓히고 이용대상을 확대하면 어떨까 싶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운전해 아이들을 태우고 갈 때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배려가 필요한 교통 약자는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어린 유아동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우선주차장은 육아가 엄마 몫이라는 해묵은 고정관념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대신 '가족우선주차장' 혹은 '교통약자 우선주차장'이라는 이름과 상징을 새롭게 쓰면 어떨까? 이용대상자도 일반 여성이 아니라 임산부와 유아동을 동반한 부모, 장애인 등으로 규정하고 말이다. 해외에는 이미 가족주차공간(parking space for family)이 보편화된 곳이 많다. 구체적인 방안은 충분한 수요 조사와 논의를 통해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한 백화점에는 여성우선주차장은 물론 유모차 전용 주차공간도 있다. 백화점 내 여성우선주차장은 일반 주차구역에 비해 넓어서 문을 여닫는 데 전혀 불편하지 않고, 유모차 전용 주차공간은 아이들이 타고 내릴 때 문을 끝까지 활짝 열어도 여유가 있을 정도다. 주차장 뿐만 아니라 유아를 동반한 부모가 이용할 수 있는 가족 전용 화장실을 마련하고 있는 곳도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들이다. 이렇게 아이를 동반한 부모를 위해 이용 환경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곳은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등 여성과 가족 고객이 많이 이용하는 소비 공간뿐인 듯하다. 하지만 이건 기업을 위해 지갑을 여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편의 서비스에 불과하기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배려가 필요한 약자를 존중하는 사회의 제도는 이와는 다른 차원이다. 사회의 품격을 말해준다. 물론 배려가 필요한 약자를 규정하는 일에는 신중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차별과 역차별 논란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여성우선주차장을 통해 경험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배려가 필요한 이에게 기꺼이 편의를 제공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품격 있는 사회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 과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