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vs 개인, 균형이 필요한 삶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아이 키우면서 어떻게 책을 썼냐고. 나는 답한다. "애들 재우고 밤에 썼어요."
글쓰는 시간은 99% 한밤중이나 새벽이다. 흔히들 말하는 '육퇴(육아 퇴근)'의 시간. 하루 온 종일 끊임없이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면,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 뿐이다. 유한하게 정해진 밤 시간, 책상 앞에 앉으면 초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된다. 데드라인을 앞두면 초인적으로 글을 마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 K. 롤링도 아이를 키우며 밤 시간에 소설을 집필했다는데, 내가 롤링보다 역량은 부족해도 그 절실함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들은 '시간 거지'다. 다른 어떤 자원보다 시간이 귀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이 나면 가장 즐겁고 원하는 일을 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는 그게 앉아서 토닥토닥 글을 쓰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뒤척거리거나 램수면의 사이클이 한 차례 지나 잠에서 깨고 나면, 주섬주섬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는 버릇이 생겼다. 때로 아이들을 재우다 함께 잠들어버려 그 귀한 시간을 놓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하루 밤 '공치고' 나면, 다음 날 몸은 가뿐하지만 어쩐지 마음은 허전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불안한 기분. 매분 매초가 산만함으로 가득찬 일상이라서, 나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꼭 무언가에 몰입하고 싶었다.
시간은 없는데 일은 하고 싶고. 그래서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그 첫번째가 바로 '스마트폰'이다. 아이들이 자면서 유난히 뒤척이며 엄마를 찾는 날이면, 나는 아이들 옆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했다. 자료를 찾고, 채팅을 하고, 심지어는 글도 썼다. 브런치는 모바일로 글쓰기에 잘 설계된 플랫폼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반응형 웹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모바일이라고 해서 인터넷 이용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마우스와 단축키 등 편리한 기능을 이용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인간의 습관은 무서운 법. 모바일 기술에 이내 적응이 되면서 스마트폰으로 처리하는 일의 속도도 빨라졌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껏 써온 글의 절반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나처럼 스마트폰에 감사(?)해하는 엄마들이 꽤 많다. 친구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일을 돌아보면 모두 밤 늦은 시간 스마트폰을 통해서였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엄마들에게 스마트폰이란, 물리적으로 자주 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고마운 도구였다. 또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과도 같은 존재였다. 새삼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또한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책임감'도 큰 동기가 됐다. 재택이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원고를 송고해야 하는 책임이 생겼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르바이트도 하게 됐다. 노동의 가치로 금전적 대가를 받는 일은 결코 나를 나태에 빠질 수 없게 했다. 사람들과의 약속, 나 스스로와의 약속도 중요했다. 엄마가 된 후 겪고 느낀 바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책 <요즘 엄마들>을 썼고, 그 실천의 연장선상으로 시작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꼈다. 내게 주어진 책임과 역할은 나의 사회적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에너지가 되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무리 밤잠을 줄이더라도,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라디오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은 잠만 덜 자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방송 시간에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는 것이 사실상 더 어려운 문제였다. 남편과 이웃집의 도움을 빌리다가 이도저도 안 되면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신청하기도 했다. 한번은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하게 됐는데,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유학을 앞두고 퇴사한 후배를 일일 베이비시터로 섭외했다. 아이 둘과 후배까지 동원해 방송국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담당 PD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일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이로군요."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사실, 궁극적으로 내가 시간을 쪼개 쓰며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궁함'이다. 10년간 일을 해오다가 일이 없어지니 너무 이상하고 괴로웠다.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감. 지금 이렇게라도 일을 이어가지 못하면 나의 사회적 자아는 점차 소멸되어 다시 꽃피우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 내가 밤잠을 아껴가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은 결국 절실함 때문이었다. 때로 '잠을 안 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내 '불꽃' 같은 모습을 보고,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몸 축나는 지도 모르고 너무 열심히 한다. 건강 좀 챙겨!"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사회, 비정상적으로 노동시간이 긴 사회, 일상의 여유와 휴식이 사라진 사회에서 버틸 재간이 없어서 썼던 사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지금 회사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불꽃을 태우며 '번 아웃'을 향해 달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 수 없다. 이미 소진증후군이 만연한 사회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동시에, 내가 언젠가부터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일에 죄책감을 갖게 된 것도 큰 이유인 듯하다. 그런데 그건 주변 엄마들도 비슷했다. 특히 아이들이 활동하는 낮에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때면 그렇게도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여성 개인의 인생도 중요하다고 역설하다가, 자기 시간에 몰두하느라 아이 키우는 일에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는 엄마에게 가혹한 시선을 보낸다. 독립된 한 개인이던 인간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때로 굴레이자 감옥으로 탈바꿈한다. 가정, 육아, 살림 등으로부터 벗어난 밤 시간만이 오직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일 수 있었던 이유다.
'시간 거지' 엄마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균형'이다. 양육자로서의 시간과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시간, 이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 독박육아가 만연한 시대, 사회는 엄마들에게 그 균형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각박한 사회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이웃으로 가득한 마을, 또는 공동체에서라면 균형을 이루는 게 가능할까? 언제까지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현재 시각, 새벽 6시 30분. 애증이 교차한다. 이 달콤하고도 씁쓸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