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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Feb 07. 2017

여동생의 결혼식

내 인생의 가장 가깝고 친한 벗에게

여동생과 나는 늘 서로의 곁에 있던 존재다. 19개월 터울인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옅은 기억 속의 유년기부터, 한 학년 차이로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학창 시절, 함께 자취를 하며 직장 생활을 하던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30년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전까지, 여동생은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엔 여동생이 그저 동생일 뿐이었다. 미성년자에게 1~2살의 나이 차이는 엄청난 수준차를 빚어내지 않나. 맞이인 난 나의 성장과 그에 따른 통증을 여동생과 크게 공유하지 않았다.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털어놓는 일도, 언니랍시고 인생에 대해 조언하는 일도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동생의 인생에 큰 질곡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에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대신 우리는 많은 일상을 공유했다. 나란히 앉아 밤늦도록 TV를 보고, 야식 메뉴를 골라 시켜 먹고, 쇼핑을 하면서 자질구레한 수다를 떨었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맛있는 음식을 자기가 좀 더 먹겠다고, 서로의 예쁜 옷을 빌려 입어보겠다고 투닥거리기도 참 많이 했다. 그런 일상의 무게란 참 가벼워서 언뜻 보면 삶에서 그리 중요도가 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크고 작은 세상사를 경험하면서, 새삼 여동생과 함께 나눈 가벼운 일상들이 얼마나 내게 크고 무거운 위로가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9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는 함께 울고 슬퍼하면서도 그저 일상을 함께 하며 천천히 아픔을 이겨냈다. 함께 요리를 해 먹고, 서로의 침대에 비집고 들어가 수다를 떨고, 각자 서로의 방이 더 지저분하다며 잔소리를 했다. 아빠가 보고 싶다며 서로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한 기억은 없지만, 틈만 나면 삐죽삐죽 눈물을 흘렸고 그때마다 피식 웃으며 눈물을 닦았던 기억은 숱하게 떠오른다.


22개월 터울의 남매를 키우다 보니 19개월 터울인 우리 자매가 어린 시절 어떻게 자라왔을지 상상이 된다. 우리 엄마가 우리를 어떻게 키우셨을지도 마찬가지다. 여동생은 "언니에게 맞고 자랐다"라고 강력히 증언하지만, 우리 두 아이를 지켜보니 여동생이 분명히 맞을 짓을 했기에 그랬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엄마가 가장 무서운 모습을 보이셨던 건 우리가 싸울 때였는데, 그 와중에 그리 억울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엄마가 중재를 꽤 잘 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추후 그 비결을 물어볼 참이다.


성인이 된 후, 여동생은 언니의 그늘 아래에서 받은 영향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엔 키도 덩치도 차이가 많이 나니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학창 시절에도 학 학년 위인 나 때문에 대외적으로 내 동생이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게 콤플렉스였다고 했다. 그러나 스스로 독립된 존재임을 깨닫고 자기만의 강점과 매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언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만의 오롯한 인생을 살게 됐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여동생이 참 멋있어졌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점차 동생에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동생은 나보다 인간적으로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을 잘 배려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든다. 잘 웃고, 눈물도 많고, 감정도 풍부해서 옆의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얼굴도 동그란 게 귀엽게 생겨서 애교도 많다. 언니 고생한다고, 조카가 예뻐 보고 싶다고, 출산 후 가장 많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준 사람이다. 나에게는 허당이라며 구박을 받지만 자기 일은 똑소리 나게 잘 하는 똑순이다. 내 눈엔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여동생 초상권 내 마음대로 막 사용함.ㅋ


그런 내 인생의 가장 친한 친구, 여동생이 지난 주말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서 내 두 아이는 웨딩 로드를 걸어가 여동생 내외에게 예물반지 바구니를 전달했다.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환호했고, 여동생 내외는 반지를 받아 들고 아이들과 포옹을 하며 너무도 행복하게 웃었다. 나는 '인생을 사는 건 바로 이런 짧은 한 순간을 위해서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그 순간을 기록한 사진과 동영상을 벌써 수십 번 넘게 반복해 보았다.


결혼식 전날, 나는 동생과 둘만의 쇼핑을 했다. 아이 낳고 몇 년간 못했으니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모른다. 동생이 신혼여행에 가서 입을 커플 속옷을 고르며 이게 예쁘니 저게 예쁘니 수다를 떨고, 한동안 먹고 싶었다며 인도 카레를 사 먹으면서 맛있다고 감탄하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별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최근의 내 기억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 유부녀가 되었으니, 곧 엄마도 되겠지. 나와 여동생은 앞으로도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어떤 육아용품이 좋다는 둥, 어떤 학원을 보내야 한다는 둥 아이 키우는 이야기이며, 남편 자랑이나 싸운 이야기도 털어놓으며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나이 들어갈 생각을 하니 설레고 기대된다. 이런 평생의 소중한 친구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 새삼 감사하다. 보혜야, 행복하고 즐겁게 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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