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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Mar 28. 2017

인생과 닮은 여행의 모습들

다시,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며

첫 배낭여행을 떠난 건 스물한 살 때였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꼭 해외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통 크게 유럽으로 떠날 만큼 재정이 넉넉하진 못했다. 그래서 정한 것이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동남아 3국을 훑어내려 가는 '말레이반도 종단' 여행이었다. 항공료와 물가가 저렴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경험도 할 수 있고, 도시와 자연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등 첫 배낭여행지로 좋은 조건이었다.


대학 동기 2명과 함께 떠났지만, 3주 간의 모든 여행 루트를 함께 하지는 않았다. 여행 도중 각자 따로 떨어져 혼자만의 여행도 즐겼다. 앙코르와트를 꼭 보고 싶었다던 한 친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다른 일행들과 함께 캄보디아 씨엠립에 다녀왔고, 태국 피피섬에 갔다가 섬의 매력에 빠진 다른 친구는 그 옆의 섬에도 가보고 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서 태국에서 말레이시아로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어보는 흥분을 느꼈다. 분단국가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면 처음 느끼는 그 순간의 야릇한 긴장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낯선 타국에서 홀로 지내는 기분은 꽤 좋았다. 비로소 성인이 된 실감을 느꼈달까.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이어지고, 상상치 못한 인연들을 만나고, 상황을 판단하고 제어하는 경험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거나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다. 객기는 과했지만 운이 좋았는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혼자서 여행을 다닐 기회가 있었고, 그 기억들은 지금도 내게 모두 강렬하게 남아있다. 온전히 나의 선택과 의지로 채워진 오롯한 내 시간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20대 초반의 여행은 '도전'이라는 단어와 어울렸다. 낯선 세계에 문을 두드리고, 이방인으로 느끼는 이질감 속에서 부대끼고, 망설이다가 부딪혀서 깨지기도 하고. 편안하지 못하고 긴장감만으로 가득했지만, 지나고 나면 성취감과 자신감이 상승하는. 금 생각하면 참 촌스럽기도 하고, 또 뭐 그리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했는지 웃음도 난다. 당시에는 여행의 의미도 잘 모른 채, 그저 깃발을 꽂듯이 발발이 돌아다니는 게 급선무였던 것 같다.


Hội An, Vietnam


취직을 하고 여행 대신 출장을 더 많이 다닐 때가 되자, 여행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여행지와 숙소를 고르는 일이나 출국 수속을 하는 일, 이동 경로에 따라 움직이는 일 따위가 그리 어렵지 않아졌다. 호화롭진 않아도 이전에 비하면 주머니 사정도 제법 나아졌고, 어딜 가거나 무엇을 먹는 데 큰 제약들은 사라졌다. 제법 멋도 부렸다. 바지런히 곳곳을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여행하는 곳보다, 여행 중인 나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는 시간들로 변해갔다.


그러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여행의 모습이 또 달라졌다. 일단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졌다. 최대 비행시간 5시간 전후로 갈 수 있는 곳. 아이들이 좁은 공간에서 동영상도 보고 식사도 하고 잠도 한숨 자면서 견딜 수 있는 한계 시간이다. 거기에 더해 아이들이 심심하지 않게 놀 수 있는 환경이면서, 무리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러다 보니 갈 수 있는 곳은 주로 휴양지로 좁혀지곤 했다. 그래서 요즘 나의 여행은 어떤 나라, 어떤 도시로의 여행이 아니라 '어떤 리조트'에서의 여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이어도,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란 사실상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이 낯선 여행지에서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상적인 일들이 모두 새로운 도전 과제로 탈바꿈한다. 부부간의 정겨운 대화나 여유로운 티타임은커녕, 교대로 번갈아가며 제 몫의 여유를 찾는 것만도 감지덕지일 때가 많다. 그래도 왜 굳이 여행을 떠나느냐 묻는다면, 지금 이 순간들이 다시 오지 않을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신없고 산만하고 왁자지껄하지만, 그 와중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남기 마련이다. 그 순간들은 사진으로도 남고, 눈에도 남고, 가슴속에도 남는다.


Lake Luzern, Switzerland


첫 아이를 낳기 전, 남편은 "돌 지나고 회사 복직하기 전에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오라"면서 참 현실감각 없지만 무척 고마운 말을 했더랬다. 아이가 태어난 후 단 하루도 아이와 떨어져서 잠든 적이 없는 지금 생각하면 향후 몇 년간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다. 언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이 올까 생각하니 당장은 아득하기만 하다.


20대의 여행은 오롯이 내 인생에만 집중하던 젊은 날의 모습과 닮아 있었고, 30대의 여행은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을 두루 살펴야 하는 지금의 삶과 닮아 있다. 여행은 인생의 모습을 따르는 것 같다. 언젠가 혼자만의 여행을 다시 떠날 수 있다면 그 값진 시간은 어떤 모습들로 채워질까. 그때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일. 여행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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