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 상상할 수 있었던 ‘나이 듦’의 최고 기준선은 얼추 30~40대였던 것 같다. 결혼은 물론 연애조차 손에 잡히지 않았고, 꿈을 이루거나 직업을 갖는 것부터 불투명하던 10대 소녀가 그려볼 수 있는 미래란 그리 멀지 않았다.
막상 40대가 되고 보니, 20여 년 전에 그리던 모습과 어떤 면은 닮았고 어떤 면은 다르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여전히 내 일을 하고 있고, 꿈꾸던 성취 중에 일부는 이뤘다.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됐다.
40대쯤 되면 우아한 중년 여성이 되어 있길 꿈꿨다. 모든 면에서 충족된 안정의 상태.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빈구석이 많아 현상 유지에도 급급한 날들의 연속이다. 원숙미를 과시하고 싶지만, 크고 작은 실수로 머쓱할 때가 많다. 다만 지금보다 어릴 때처럼 거창한 목표에 짓눌리기보다, 옳다고 믿는 방향 속에서 오늘 하루 매 순간을 충실하고 꿋꿋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몇년 전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했을 때 삶의 태도를 묻는 진행자의 기습 질문에 “저는 오늘만 생각하며 산다”고 답한 적 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만큼 중요하고 큰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뉴스를 브리핑하는 역할을 하던 내게 사전 조율되지 않은 예상 밖 질문이었기에, 그 순간 정말 솔직하게 답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종종 마흔 저 너머의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50대 혹은 60대가 되면 내 모습이 어떨지 막연하나마 그려본다. 지난 4월 26일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70대 배우 윤여정의 말이 나를 매혹시켰다.
“사치스럽게 살기로 결심했어요. 60살 이전에는 나름 계산을 했어요. 이걸 하면 성과가 좋겠다. 그런데 60살 넘어서부터 약속한 게 있어요. 사람을 보고, 사람이 좋으면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으면 사치스러운 게 아닐까요.”
인생에 통달한 듯 여유와 위트를 뽐내는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지만, “상은 중요하지 않다”던 그가 중요한 것은 삶을 주체적이고 선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임을 역설한 것이 내겐 멋졌다. 어지러운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기준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나아갈 수 있는 오롯함.
“돈이 급할 때 가장 연기를 잘 한다”며 실존의 무게를 통찰하는 그를 통해, 나의 오늘 앞에서 더욱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삶에서 몇 장면 되지 않는 영광의 순간도 긴 인생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긴 뒤 곧 그 다음 순간을 맞이하는 법을 안다. 삶의 매 순간에 성실한 그의 태도를 깊이 경외하며, 근사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더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