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의 집은 어디인가
도서관에 가면 언젠가부터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스트’라는 단어가 눈에 많이 띄었다. 주거나 생활 관련 신간, 혹은 에세이에서도 비슷한 제목과 주제의 서적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그 분야의 선진국인 일본 번역서였는데 미니멀리즘 관련 책들은 시장에서 오히려 포화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니멀리즘은 생활에서 넘치는 것들을 덜어내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으로 생활하자는 주의다. 그래서인지 그런 책들의 내용은 주로 집안 정리정돈, 청소, 수납을 교육하는 실용서들이었다. 일단 내가 가진 것들을 죽 일별 한 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들을 처분하는 것이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선행과제였다.
사실 사치품이나 값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소유한 물건 자체가 많지 않은 나는 이미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비우기’나 ‘최소한’ ‘~없이 살기’ 같은 책 제목을 보면 늘 강한 호기심을 버릴 수 없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더 가볍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늘 존재했다.
쓸데없는 물건은 잘 사지 않는 주의지만 나이를 먹다 보면 세월에 따라 축적되는 잡동사니들이 있게 마련이다. 한정된 방 한 칸에 전 재산을 욱여넣고 있으니 방이 좁다 싶으면 물건을 비우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지 몰랐다. 게다가 변화가 없는 내 생활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라도 가끔씩은 주변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한 번씩 공모전에서 탈락할 때마다 쌓여가는 A4 프린트, 넉넉하게 사뒀던 큰 서류봉투들과 클립, 신문이나 잡지 스크랩...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지 못한 재료들은 그냥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다. 새로운 다짐과 함께 방청소를 할 때마다 후련함과 함께 허무감도 맴돌았다.
미니멀리즘 실천 첫 단계는 우선 ‘버리기’였다. 쓰지 않는 물건, 가치나 의미를 상실한 채 막연히 아깝다는 생각에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첫 번째 품목으로 전문가들이 꼽는 것이 바로 ‘책’과 ‘옷’이었다.
옷은 유행도 있고 소모품에 가까우니 버리고 새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책이 우선 정리 대상이라는 사실은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나는 책을 신중하게 고르고 일단 구입했으면 무척 아껴본다. 더구나 과거에 출간된 책은 소장가치가 더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고, 책의 내용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간 나름대로 책 정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새 책이나 다름없는 외국 소설이나 세계문학전집 등을 펜션을 하거나 독서를 좋아하는 친지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고 진지한 문학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소중하게 읽어주길 바라서였다.
일부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기도 했다. 구입 가격의 10분의 1 정도의 헐값에 넘기느니 그냥 소장하기로 작정한 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 정리에 들어간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이 불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알라딘이 아닌, 중고책을 매입하는 서점을 알아봤다. 블로그에 나온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더니 2시간 후에 방문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나는 낑낑대며 그간 정말 아까워서 내놓지 못한 문학전집 두 질과 소설류 등을 박스 두 개에 담아 골목까지 끌고 나갔다. 하드커버 장정의 새 책을 포함 거의 마흔 권이었다.
“요새 책이 너무 많아요.”
대문 앞에서 나를 만난 중고 서점 주인은 단번에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세상에 깔려 있는 것이 책이고 가져가 봤자 팔린다는 보장이 없단다. 박스 안의 책들을 요리조리 뒤적여보더니 트집을 잡으면서 가격을 깎을 궁리를 했다.
“다 해서 만 원밖에 못 드리겠는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적어도 삼만 원 이상을 기대했던 나는 귀를 의심할 뻔했다. 결국 선심 쓰듯 이천 원을 더 얹어준 그는 가볍게 책 두 상자를 들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집안으로 돌아와 손에 쥔 만 이천 원을 보자 마치 책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강탈당한 것처럼 얼떨떨했다.
책 두 박스를 비워낸 내 방을 둘러보았다. 책장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들이 사라지자 조금은 묵은 짐을 덜어낸 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후련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애매한 기분에 휩싸였다. 요즘에 책이 너무 많다는, 남자가 남긴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이렇게 책이 흔한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을 더해보겠다고 오늘도 절치부심하는 나 자신 때문이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