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봄이 왔다
한밤중 또 불현듯 잠에서 깼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엄마가 화장실을 다녀온 인기척을 느꼈는데 그 후로 물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설마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물소리가 그치기를 바라며 시간을 헤아렸다. 5분, 10분 정도가 흘렀는데도 집안을 돌아다니는 물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거실로 내려가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면대에서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가 물을 줄줄 흘려보내고 있었다. 벌써 여러 번 당하면서도 이런 순간에는 눈앞이 아찔해진다. 눈앞의 상황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세면대 거울 앞에는 빨간 사인펜으로 ‘수돗물’이라는 글씨가 여러 곳 붙어 있다. 엄마 스스로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써 붙인 것이다. 그러고도 엄마는 볼일을 본 후 수돗물 잠그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 태연하게 손을 씻고 거울 앞에서 유유자적 외모를 비춰본 후 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누운 채 환한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엄마는 주로 식사 시간 사이에 긴 낮잠을 주무신다. 자연히 밤에는 잠을 못 이루다 보니 화장실도 자주 드나들게 된다.
방으로 올라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휴대폰 화면엔 새벽 3시 30분이라는 시간이 표시되고 있다. 눈앞에는 여전히 콸콸 흘러내려가던 수돗물과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엄마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얼마 전에도 엄마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나와버려 30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발견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이내 다시 잠에 들 것인데 나만 홀로 천장을 바라보며 또 뜬눈으로 지새운다.
심란함에 잠이 달아나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찾았다.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할까 하다가 어쩐지 브런치 앱을 켜본다. 오늘도 검은 화면엔 “글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라는 문장이 나를 반기고 추천된 브런치 북의 표지가 떠오른다.
요즘은 도서관에 가서 신간을 대출해도 몇 페이지 들춰보지 않고 다시 반납하는 일이 잦다. 욕심을 부려 잔뜩 빌려와 놓곤 마음이 복잡해 글자 한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철학책은 뜬구름 잡는 소리 같고, 역사책은 현재의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다.
그런데 오히려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들이 읽을 만하다. 백수, 학생, 회사원, 공무원, 의사 등 다채로운 배경의 작가들, 육아, 요리, 여행, 자기 계발, 재테크 등 소재와 주제도 무한대다. 가끔 흥미가 생기는 키워드가 있어 검색창에 쳐보면 금세 관련 글을 찾을 수 있다. 작품의 다양성과 깊이는 이미 출간된 책들에 별로 뒤지지 않는다.
추천 브런치 북으로 올라오는 작품들을 보면 늘 감탄하곤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종이책으로 출판되지 않고 브런치 안에 머물러 있으니 공짜로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점에 감사해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 어쨌든 브런치는 하나의 거대한 전자도서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잠깐 볼일을 보고 돌아오다 길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달 들어 복잡한 집안일에 몰두하는 사이 어느새 거리의 나무들이 신록으로 갈아입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볼품없던 회색 가지들이 이제는 눈부신 연초록 잎사귀들을 달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햇살에 따라 더 밝은 혹은 더 진한 녹색으로 몸을 뒤채는 가로수들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 때 저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이 저마다 다른 색감을 뽐내던 것이 떠올랐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여전히 신령스러운 허연 바위였지만, 그 아래는 빽빽한 짙은 초록이, 그 밑으로는 소소한 녹색 잡목과 울긋불긋 꽃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렇게 세상은 어느덧 봄의 걸음에 맞추어 나아가고 있는데 나 홀로 온갖 고민과 번민에 휩싸여 늦겨울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야 봄이 가져온 변화를 뒤늦게 발견하며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삭막하고 그늘진 마음속에서 좋은 글이 우러나올 리 만무했다. 오늘도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모르겠다며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또 무거운 마음을 안고 눈을 뜨곤 했다.
그러다 한밤중 잠이 안 와 브런치 속 작품들을 헤집어 보니 수많은 작가들이 오늘도 부지런히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구독하고 있는 어떤 작가님은 새벽같이 글을 올려 내 모닝벨 역할을 한다. 작가들의 글 속에서 눈물과 웃음과 기쁨과 지혜를 오늘도 배운다.
브런치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오늘도 좋은 글들을 통해 머릿속이 꽉 차고 배가 부르다고, 힘을 얻고 나 자신을 다독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