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 길을 내어 준다
할 줄 아는 것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책 읽기다. 어느 날 도서 대출 목록을 보니 1년에 수백 권이 넘는 책 제목이 찍혀 있었다. 벌써 10여 년 전부터 늘 비슷한 권수의 책을 읽어왔다.
대출하는 것은 주로 동화나 소설류, 관심 있는 인문학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관심 언저리는 늘 비슷한 궤도를 그렸고 그 범위를 넓히기엔 대출권수라는 제한이 있었다. 나는 책을 빌려서 집에서 읽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일로 집이 지겨워진 어느 날, 도서관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도서관 밖에 갈 곳이 없었고 그곳에선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그간 내가 해온 책 읽기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동화 작품들에게서 더 이상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서 멀리 떠다니는 별이거나 내가 그들로부터 추락하는 비행사 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동화로부터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 동화를 잘 쓸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오후까지 버틸 수 있는 물 한 병과 커피, 간식거리를 싸가지고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예전에는 책을 빌려 귀가하기 바빴는데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여유롭게 둘러보니 도서관이 어딘지 다르게 느껴졌다. 서가로 가득한 실내, 고즈넉한 분위기, 면학에 열중하는 이용자들은 전에 없던 설렘을 주었다.
예전에는 눈길도 안 주던 자기 계발서, 재테크 책들을 뽑아와서 읽기 시작했다. 요즘 무섭게 쏟아져 나오지만 내가 외면했던 ‘글쓰기’ 책들도 들춰봤다. 공책을 하나 마련해 글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나오면 베껴 적었다.
‘으음 맛있겠어, 맛있겠어!’
여우 아저씨는 쩝쩝 입맛을 다셨어요. 이곳에선 공짜로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죠. 그 후 아저씨는 매일매일 도서관에 갔어요. 과연 어떤 책들이 입맛을 당기는지 살짝 알아보려고, 쪽쪽 핥아 보고 킁킁 냄새 맡고 이것저것 몇 쪽을 맛보았지요. 그리고 입맛에 맞는 것을 찾으면 가방에 쓰윽 집어넣고 집으로 왔어요.
(독일 동화 ‘책 먹는 여우’)
늘 하던 독서 범위를 벗어나니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의 해결책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언제나 발목을 잡는 집안과 가족의 소소한 문제들은 심리학이나 상담책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가정 문제를 겪고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테크나 자기 계발서는 허황되거나 얄팍한 철학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야 비로소 돈이 따라온다는 깨달음을 배웠다.
전에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책 한 권 한 권이 알고 보니 거대한 우주였다. 이 책과 저 책을 읽다 보면 책들은 한 곳에서 서로 만나고 교차하며 더 큰 그림을 그렸다. 덩달아 내 세계도 무한히 확장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독서에 눈을 뜨면서 전에 없던 아이디어와 의욕을 발견했다.
“여우 아저씨는 교도관 빛나리 씨를 꾀었어요. 이제껏 책에서 읽은 온갖 듣기 좋은 말은 다 했지요. 교도관은 감옥에서 일하며 죄수를 돌보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종이와 연필을 얻는 데 성공했어요. 여우 아저씨는 밤낮없이 종이에 글을 썼어요. 마치 연필에서 생각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어요. ”
(독일 동화 ‘책 먹는 여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우 아저씨에게 많이 공감할 것이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까지 한다는 것은 책사랑에 대한 하나의 은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평범한 애독가가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에 대한 힌트를 발견하게 된다. 많이 읽으면 글이 나온다, 는 진리를 얻을 수도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교훈을 말한다. 그동안 나에게 그 말은 관념적인 문구였다. 하지만 정말 책을 파고들다 보니 그 속에 길이 보였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주제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나타났다. 글을 잘쓰기 위해 작법서를 읽을 수도 있지만 넓은 독서는 그 이상의 넓은 길로 나를 안내한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