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다녀야 하나?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기는 했다. 군것질할 돈을 아껴서 한 권 두 권 모은 문고판 소설들은 나의 큰 재산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서 차원으로 책을 좋아했지 책을 쓰는 사람이 되려는 꿈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방과 후 활동으로 문예반 혹은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두 분야 다 정적인 내 성격에 맞아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미술반은 이젤이니 화구 박스가 폼나서 활동할 맛이 났지만 문예반은 고작해야 원고지 들고 끼적거리는 게 다라 멋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문학적인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서른 살 무렵이었다. 영어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번듯한 직업을 추구하며 자격증 시험공부를 시작한 참이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시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모든 경험을 소설 소재로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캐릭터가 되고 이 장소와 저 사건은 배경이나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늘 카메라 감독처럼 타인을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도 본능적으로 소설책에 더 눈이 갔다. 뒤늦게 문학 공부 비슷한 것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박완서 님과 양귀자 님이 좋아서 그분들의 작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어느새 시험공부는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나중에 도서관 대출 목록을 보니 일 년에 보통 삼사백 권의 책을 읽었다. 일본 소설, 미국 소설, 고전, 추리, SF…. 문학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 없는 책이면 옆 동네 도서관까지 찾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많이 읽으니 자연히 글이 쓰고 싶어졌다. 목욕탕에 갔다가도 사우나 실에서 엿보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곤 했다. 길거리, 시장, 슈퍼마켓… 잠시 외출했다가도 수없이 밀려드는 문장들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창 의욕적으로 읽고 쓸 시기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글 쓰는 사람에 대한 뚜렷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소설가, 시인, 드라마 작가… 직업으로 글을 쓴다면 한 장르를 택해야 하지만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서른 살이 되도록 여전히 나는 내 적성과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공모전 정보를 모아 놓은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정식 작가가 되기 전에 시험 삼아 도전해 볼 수 있는 각종 백일장, 산문 공모전, 글짓기 대회 등이 많았다.
어느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놀랍게도 심사위원님이 소설가 양귀자 선생님이었다. 수상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심사평이 발표되었다. 뜻밖에도 내게 문학적 소질이 엿보인다는 칭찬을 해주셔 얼떨떨했다. 처음으로 내 자질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계기였다.
사실 나는 등단할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어딘가에서 동화나 글쓰기를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순전히 책을 읽고 혼자 써본 것이 다였다.
사실 글을 쓰는데 배움이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해봤다. 문예창작을 전공할 수는 있겠지만 글쓰기란 어차피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쓴 글에는 모범답안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독학파(?)라고 하면 오히려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사위원 분들은 대개 이런 반응을 보이셨다.
“옛날에는 다 그랬어.”
처음에는 이런 내 스타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글을 배우거나 나누는 스승과 동료가 없어 외로울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빚이 없는 나 자신이 떳떳했다. 하지만 첫 책이 나온 후 수년간 계속 여기저기 응모해도 아무 결과가 나오지 않자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내가 막 등단했던 그 시점부터 동화계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쉽게 인정받곤 했던 작품들도 어느새 등장한 새로운 트렌드나 신인 작품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제라도 학원에 다녀야 하나, 뒤늦은 혼란이 찾아왔다.
언제부턴가 해가 바뀌어 설날 세배를 할 때 부모님의 덕담은 “올해는 꼭 좋은 책을 내라.”로 고정됐다. 그러다 최근에는 서로 민망해 그 소리조차 쑥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