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통이 낳은 카스텔라

밥통 아니라 천재

by 겨울이

진짜 겨울은 한파주의보와 함께 왔다. 외출을 자제하고 수도 계량기 동파사고를 주의하라는 문자가 응급상황처럼 연이어 도착했다. 그간 온난한 날들이 이어져 방심했더니만,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흐릿한 하늘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음산한 기운을 잔뜩 품고 세상을 내려다봤다.


과연 아침에 일어나자 살벌해진 공기가 전날과 다름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집안에 있어도 어디선가 칼날 같은 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해야 떴건 말건 세끼 밥 때는 꼬박꼬박 돌아온다. 시퍼런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녘, 주섬주섬 일어나 겨우 아침을 먹자마자 금세 또 돌아오는 점심시간이 막막했다.

매일 똑같은 밥과 반찬에 시들해진 입맛을 돋워줄 특별한 음식이 없을까.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덥혀줄 무언가 따뜻하고 충만한 먹을거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바로 빵이다. 부드럽고 따스하고 포근하며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가득 차는, 누구나 좋아하는 빵. 한동안 장을 보지 않아 냉장고와 찬장은 휑하지만 기본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밀가루, 설탕, 우유 덕분에 용기를 내본다.


사실 빵은 먹는 것만 좋아하고 만들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작정 덤벼들 수 있는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빵은 이미 준비되고 훈련된 자만이 도전할 수 있는 세계 같았다. 낯선 재료와 용품이 필요해 빵을 만들려면 외국어를 배울 때처럼 알파벳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계랑 저울, 밀가루 체, 거품기, 밀대... 필요한 물품의 리스트가 많았지만 진짜 장애물은 바로 ‘밀가루’ 그 자체였다. 유튜브로 제빵 영상을 많이 봤는데 몽실몽실 부풀어 오르는 반죽과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나오는 갈색 빵 보다 사방팔방 휘날리는 밀가루, 반죽 떡 진 손과 힘들게 치대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빵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밀가루와 친해지고 밀가루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공공의 적이 된듯한 정제 탄수화물, 빵은 바로 그 대표주자였다. 게다가 베이킹 영상을 조금씩 보며 알게 된 건데, 빵에는 밀가루와 똑같거나 더 많은 양의 설탕과 유지가 필수적이다. 그러니 섣불리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빵의 세계였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 집에는 빵을 구울 오븐이 없다. 5년 전쯤 전자레인지를 구입하면서 오븐을 버려버렸다. 통닭과 생선 몇 번을 해 먹고 싫증이 난 오븐을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폐지와 함께 골목에 내놓은 거였다. 뭐든지 쓰지 않는 것을 정리하고 물건을 여러 가지 구입하기보다는 한 가지로 다양하게 쓰자는 생활방식을 실천한 이후였다. 당시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을 많이 본 영향이기도 했다.


프라이팬이나 찜솥으로 빵을 만든다는 금손들도 보았지만, 오븐처럼 전체적으로 굽는 효과를 가진 도구가 없을까 둘러보았을 때 불현듯 압력밥솥이 눈에 들어왔다. 열 개도 넘는 메뉴 버튼을 그간 밥 짓는 것에만 사용해 왔는데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니 밥솥에는 찜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밀가루 세 컵과 달걀 세 개, 우유는 반죽이 풀어질 정도로만, 설탕은 조금만 넣고 카스텔라를 만들기로 했다.

베이킹 영상들을 보면 꼭 노반죽 빵이라고 해놓고 대신 손으로 수건 접듯 여러 번 접어주라고 하고, 30분 완성이라 해놓고 하루 전에 냉장고에 발효시키라고 했다. 그러니 이스트 넣고 반죽하는 빵이 아니라 베이킹파우더 넉넉히 넣어 잘 섞은 후 굽기만 하면 되는 카스텔라 빵이 내 그릇이다.

원래 버터나 하다 못해 카놀라 유라도 듬뿍 넣어줘야 하는데 기름기가 싫어 생략했다. 기름은 빵이 잘 떨어지라고 내솥 안에 발라줄 때만 쓰기로 했다.


반죽 양이 많아서 20분 찜 시간으로 두 번 돌리고 젓가락으로 찔러 묻어 나오면 한 10분 더 구워주었다. 어느덧 집안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퍼지며 기대를 고조시켰다. 두근거리며 밥솥 뚜껑을 열자 한껏 부풀어 오른 노란 빵이 밥솥을 가득 채우고 탄생했다. 적당히 구워진 빵은 내솥 밑바닥에서 브라운 색으로 타서 바삭하고 쫄깃했다. 엄마는 일부러 빵 아래쪽을 뜯어먹으면서 그 부분이 제일 맛있다고 하셨다.

요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밥솥으로 빵을 만들었다고 하니 믿지 못하셨다. 설탕도 기름도 많이 안 들어가 약간 퍽퍽하고 카스텔라라기보다는 찜케이크에 가까운 빵이지만 그저 빵의 모양을 갖춘 것에 만족하고 먹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평소 우리가 잡곡밥을 해 먹는 압력 밥솥이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틈만 나면 고급 오븐을 검색해 보며 고민하던 나였다. 하지만 밥솥으로 소박하게나마 빵을 만들 수 있다면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혹자는 미니멀리즘이 가난한 자의 변명이라고 하고 혹은 다 버리고 새로 사려는 핑계라고 말한다. 나에게 간소하게 살기는 억지도 아니고, 현실의 유일한 선택에 가깝다. 돈이 없으면 안 쓰는 게 맞고, 집이 좁으면 많이 사들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뭐든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당장 사기보다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글라스 밀폐용기를 갖고 싶을 때, 다 먹은 스파게티 유리병을 대신 사용해도 되는 것처럼.


이제는 멋진 오븐을 동경하는 대신, 밥통으로 더 다양한 빵을 해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연구해 본다. 사고를 확장해 보니 밥통은 생각지 못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밥통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내가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밥통은 나였는지도, 그리고 밥통은 오히려 팔방미인 천재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