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온이는 겁이 많은 아가였다.
지켜보면 온갖 것에 다 놀랜다.
낮잠 자던 아기 깬 소리가 들려서 방문을 열고 아기 이름을 부르면 종종 화들짝, 하고 온 몸이 전기에 '찌릿' 하듯이 놀란다. 그리고 이내 엄마인걸 알고 안심하는데...
이렇게 놀라는 일이 잦다. 아기가 아기침대 안에서 모빌을 쳐다보고 누워있을 때도 내가 갑자기 침대 위에서 쓱 하고 바라보면 또 파드닥거리며 화들짝 놀란다.
아빠가 아기에게 급 접근하면 얼마나 깜짝 놀라는지 완전 펄쩍 뛰면서 놀랄 때도 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아기한테 다가가지 말라고 남편한테 뭐라 했었는데 사실 엄청나게 급작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아들~~~♡ 이렇게 남들 하듯이 행복하게 소리쳤을 뿐...
남편이 아니라 엄마인 나나 아기 할머니나 누구라도 급 다가가면 아기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런저런 별거 아닌 소리(랜덤이다.)에도 온몸으로 떨면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곧잘 다시 바로 안심한다.
오늘은 아기띠 해주려고 아기띠 허리를 치이익 하고 뜯으니(이 소리는 이제 익숙할꺼라 생각했다.) 미친 듯이 놀라면서 옆에 있는 개구리 인형을 껴안았는데 이건 마치 우리가 만화에서 보는 것같이 "너무 놀래서 오들오들 떨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와락 껴안듯이" 그렇게 개구리를 껴안고 눈이 둥그레졌다.(너무 불쌍하면서 너무 귀여운 모습이다...). 그러고 나서 사태 파악이 되면 즉시 다시 안심한다.
기본적으로 잘 놀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놀라서 운 적은 없고 주로 화들짝 화들짝 잘하는 아기이다. 와앙 울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서 놀래고 있으니 더 불쌍할 때가 있다.
어제는 아기를 안은 채로 방 곳곳을 보여주며 서성거리다 닫혀있던 커튼을 주욱하고 열었다. 그 "커튼 레일을 따라 커튼이 쳐지는" 치이익 소리에 아기가 갑자기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팔다리까지 떨었다. 아니 이건 뭐지ᆢ 그냥 아기 안고 커튼 한 번 열었을 뿐인데 이 예상치 못한 이 반응에 나까지 깜짝 놀랐다.
이건 커튼 소리야. 재미있는 소리야. 해온이가 놀랐네? 다시 해볼까? 아무것도 아니네?
라고 즉시 안심시켜주었는데, 내 품에서 안심하는 듯하면서도 다시 커튼을 치면 또 엄청 무서워했다. 계속 커튼이 뭔지 알려주며 안심시켜주면서 한두 번 더 하니까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기의 세상에는 놀라고 무서운 것 투성이일 것이다.
나한테야 "커튼 소리"지 애기한텐 그게 무슨 소린지 어떻게 알겠는가.
아직 태어난 지 다섯 달 밖에 안돼서 하늘이 뭔지도, 아직 걷지도 못해서 땅이 뭔지도, 본 적도 없어서 바다가 뭔지, 강아지가 뭔지도 모르는데 아기한텐 커튼을 펼치는 이 소리가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끔 끝도 없이 광활해 보이는 저 미지의 엄청난 육아 우주에서, 나는 아는 것도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위축되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어쩌면 나의 역할은, 그냥 이렇게 심플하게 우리 아기의 보호자로서 아기 옆에서 "이건 재미있는 소리야"라고 말해주고 안심시켜주고 안전하다고 확인시켜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는 무서운 혼돈의 순간을 일순간 재미있고 흥미로운 세상으로 변신시켜주는 그런 거대한 일을 엄마라는 나란 존재가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쥐뿔도 모르면서 갑자기 육아 자신감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는 이번에도 나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만의 작은 깨달음이었는데...
아기는 마음껏 무서워하고 또다시 무서워하지만 그냥 그럴 뿐이었다. 왜냐하면 해온이는 그런 아이이기 때문이다. 자기 앞에 뭐가 펼쳐지던지 생긴 대로 반응하고 말았다. 언제나 한결같이 자기의 모습대로 반응했다. (아기가 막 "옆집 아기는 이런 거 안 무서워하던데 왜 나는 이런 게 무섭지..." 이런 식으로 자책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또 아기가 "난 왜 이런 걸 무서워하는 성격일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아기는 자기에 대해서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온이는 잘 놀라기도 하지만 어떤 소리들에는 뜬금없이 웃겨서 넘어가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내 기침소리, 자기한테 말 거는 소리(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기타등등(이것도 랜덤이다)이 있다. 아기는 이렇든 저렇든 하루하루 무서우면 무서워하고 웃기면 웃고 그렇게 자기의 고유한 성질과 품성대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난 또 왜이렇게 예민할까라거나, 난 또 왜이렇게 너무 슬프지 라거나, 도대체 난 왜 이러지 같은... 이런 반복되는 자기 검열이 없잖아. 나도 배워야지 라고 생각했다.
나도 살아가면서 내 앞에 뭐가 펼쳐지던지 (큰 일이든 조그맣고 예민한 일들일 지라도) 그냥 내 생긴 대로 반응해버리면 그만이겠구나. 내가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고 무심하거나 둔감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너무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들일 것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아기에게도 자기 검열이 있다고 해도 엄마인 나는 알고 있다.
겁이 많은 해온이던, 순한 해온이던, 둔한 해온이던, 잘 놀라는 해온이던, 깔깔거리고 웃겨서 넘어가는 해온이던, 물을 좋아하는 해온이던, 그 어떤 해온이던... 해온이는 사랑스럽다. 해온이는 소중하고 해온이는 아름답고 해온이는 존귀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럴 것이다.
난 왜 이럴까.... 수백 번 수만 번 고민해본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는 결국은 이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별과 같고, 별보다 더 아름다운 물질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깨달음. 그리고 지금 짧은 순간만 존재한다는 깨달음.
나는 사소한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사소한것에 경기 일으키면서 웃는 우리 아기가 (제일) 좋다.
사소한것에 놀랐다며 고민하는 아기 말고, 경박하게 경기 일으키며 웃었다고 후회하는 아기 말고 말이다.
그러니 마음껏 반응하자. 그리고 까먹자. 되새겨 볼 필요가 없다. 그저 또 다음 순간에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향해 다시 온 몸으로 반응해보자. 그렇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