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문노트

주먹을 쥐다

짧은소설쓰기001

by 책선비

살에 둘러싸이면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매일 먹고 싶은 음식들을 적어놓고 먹고 난 후 하나씩 지워나갔다. 가운데 줄을 팍 그을 때마다 성취감과 쾌감이 동시에 올라왔다. 나는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었다. 문득 음식 말고 할 일 목록을 만들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웬만한 음식은 다 먹어본 터라 음식 목록을 지워나가는 일이 좀 지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목록에 적힌 것들을 전부 지워나갈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니까.


‘집에서 영화보기’를 할 일에 추가했다. 피자와 통닭을 주문하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검색했다. 여러 추천작을 둘러보다가 나와 비슷한 몸매의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상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맵고 뜨겁게>. 얼핏 보기에 뚱뚱한 여자 주인공이 살을 빼기 위해 권투를 시작하고 늦은 나이에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여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복수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 같았다. 그래서 다른 영화를 보려고 페이지를 넘기는데 자꾸 <맵고 뜨겁게> 속 뚱뚱한 여자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나를 따라다녔다. 뻔한 이야기가 뻔하게 흘러가는지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졌다. 결국 처음 추천 화면으로 돌아가 시작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뚱뚱하고 무능해서 가족과 남자친구, 절친 모두에게 상처를 받고 외면당하는 여자 주인공 ‘두러잉’. 하루 종일 먹고 매일 살을 키워나간다. 모든 분노와 미움, 아픔 조차 자신의 살 안에 가두어버린다. 세상은 참 가혹하게도 그런 그녀에게 더 큰 시련과 아픔을 퍼붓는다. 인간이란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기로 그녀는 권투를 배우고 선수가 되기 위해 지독한 훈련을 받는다. 자신을 둘러쌌던 50키로의 살을 덜어낸다. 그리고 맨몸으로 온갖 펀치에 맞서게 된다.


두러잉은 잔혹한 펀치에 계속 맞기만 했다. 겨우 버티던 그녀가 최후의 한방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팔을 휘둘렀을 때 나는 기대하고 또 기대했다. 두러링이 분명 상대를 멋지게 넉다운 시킬 거라고. 하지만 더 강력한 펀치가 그녀의 뺨에 내리꽂혔다. 내 눈은 이미 수도꼭지가 되어 쉴새없이 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치열하게 싸우고 난 뒤 서로 안아주는 모습이 좋아서 권투를 선택했다는 투러링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를 짓눌렀던 광폭한 손길이 몸을 휘감았다. 욕이 터져나왔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모두 죽이고 싶다고 외치고 또 외쳤다. 한참 동안 그러고 나니 허기가 졌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냥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데 두러잉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과 수많은 펀치의 흔적인 피를 닦아내던 모습. 나는 주먹을 쥐고 팔을 뻗었다. 아, 목록에 추가할 것이 생각났다. 메모지와 펜을 찾으러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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