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던데
독서모임에서는 매달 돌아가며 읽을 책을 정한다. 모임이 끝날 무렵 다음 달 책을 책반장이 발표하는데 제목만 듣고서 어떤 책인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다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에세이쯤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다. 이건 과학 책이다. 무려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쓴 과학 책이다.
책에서는 적자생존을 부정하며 진화의 최종 승자는 다정한 자라고 말한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최종 승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친화력 좋은 다정한 자다. 여러 동물 생태계 실험을 통해 다정함의 우수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내미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재밌게 읽은 부분은 늑대 무리 중에서 친화력 좋은 개체들이 인간들과 어울려 스스로를 가축화해서 개가 되었다는 것과 모계 중심 사회의 동물 보노보에 대한 이야기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그야말로 적자생존의 전쟁터 같은 삶을 산다. 강한 수컷이 우두머리가 되고 무력으로 무리를 다스린다. 반면 보노보는 암컷 중심 사회다. 보노보는 먹이를 나누어먹고 약한 개체를 돕는다. 그 결과 사나운 침팬지보다 다정한 보노보가 더 성공적으로 번식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독서모임을 통해 읽었던 몇 권의 과학책 중에 가장 재치 있다. 우리가 왜 다정함을 잃지 않고 친화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고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는 재미난 자연 과학서다.
오후에 간장 진열대 앞에 서서 간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샘표 간장병 앞에 한참 서서 구경하는데 청정원 간장 판촉 사원이 다가왔다. 보통 마트에 근무하는 판촉 사원들은 어떻게든 본인이 판매하는 제품을 팔려고 이런저런 말을 걸게 마련이라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저 그냥 알아서 구경할게요.”
했는데 꿋꿋하게
“그러지 마시고 저희 것도 구경해 보세요.”
연신 말을 붙인다. 이런 식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으니 딱딱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내버려 두시라 부탁했다. 잠시 후 판촉사원이 다시 오더니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하며 간장병을 건넸다. 무안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걸 주시면 제가 간장을 살 일이 없어지는걸요.”
“괜찮으니까 이거 드셔보세요.”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하며 받아 들었지만 여전히 낯 뜨겁다. 조금 전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게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름 세상을 다정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은 완전히 틀려먹었다. 감사합니다 뒤에
“아까 그렇게 말한 거 미안합니다.”
한마디를 덧붙이지 못한 게 작은 후회가 되어 집에 오는 길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오늘 간장병을 든 여인에게 완벽하게 졌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 것에 대한 증거가 차고 넘치는 과학책을 재밌다며 읽어놓고도 여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챙피해 자려고 누워서도 얼굴이 빨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