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습이던 당신을 존중하고 응원합니다.
취업준비가 2년째 계속된 날들이었다. 그때의 난 H&M(에이치앤엠헤네스앤모리츠)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었다. 주 20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로 바쁜 나날들을 보냈던 그 날들.
한참 하반기 서류를 내기 시작할 즈음, 입사한 지 두 달이 지나니 본사로 내부 교육을 다녀오라는 공지가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그 정도 되는 파트타이머들은 교육을 받고 오는 것이 절차 같았다. (H&M은 파트타이머가 정직원 후보군 같은 느낌. 추후 사내에서 오픈되는 다양한 포지션에 지원할 수 있다.) 교육 날이 되어, 명동의 교육장소에 도착하자 나 이외에도 다양한 매장으로부터 여러 입사 두 달 차의 파트타이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패션 브랜드 답게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흔히 말하는 '센 언니'로 보이는 분을 시작해서 히피룩을 선보이는 분까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교육은 전반적으로 H&M의 사내 문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이를 직원들에게 함양시키기 위한 일련의 참여교육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안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순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으로 표현하고 직접 소개하는 과정이었다. 음, 그림이라면 전혀 솜씨가 없는 내게 그림이라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걸 떠올리다 보니, 머릿속에 불현듯 가장 열심히 듣고 있었던 앨범의 커버가 떠올랐다. 권진아의 <나의 모양> 앨범이다. 심플한 앨범커버와 포함된 의미가 이거다 싶었다.
그 당시 나는 2년째 계속되는 취업준비에 지쳐있는 상태였고, 새벽 귀갓길에 이 앨범을 들으며 많은 위로를 얻었다. 나라는 사람이 과연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일지, 환영받는 사람일지 의심이 계속되던 나날들이었다. 이 앨범은 누군가에게 모나 보일 수 있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순응하는 과정들이라 내게 느껴졌다. 2-30분 남짓의 먼 귀갓길에도 이 앨범이면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 권의 일기장 같아서 그렇게 잔잔히 위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진심이 담긴 앨범 커버를 그려내서였던 걸까. 본래 자기소개에 취약한 나지만, 이번엔 내 소개를 아주 멋들어지게 마쳤다. "앨범 커버의 동그라미, 네모, 세모의 다양한 모양처럼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모습이잖아요. 꼭 쓸모 있거나 예쁘고 아름다운 모양이 아니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제 삶의 태도를 담아서 이 커버를 그려 담았습니다. 그런 마음만큼이나 나도, 여러분도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응원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라고.
별 의미 없는 몇 살의 어디 사는 누구입니다의 소개가 아니었다. 진솔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말하는 자기소개는 솔직한 경험이었다. 그래,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데 그런 피상적인 프로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일련의 프로필로 기억되기보다,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서 교육 말미에 진행된 롤링페이퍼. 각자의 등에 커다란 종이를 붙이고, 서로의 등에 가서 칭찬하는 말들을 적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어쩔 수 없이 적어낸 칭찬일지도 모르지만, 이때의 기억은 나에게 꽤나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나라는 사람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경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내 생각을 경청해주고 긍정적으로 여겨준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감동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2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비록 당시의 꿈인 MD(머천다이저)가 되기는커녕, 개발자가 되었다가 다시 또 에디터로 방향을 바꾸어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건 내 안의 순수함인 듯하다. 순수함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방황하다, 이제는 순수함과 따뜻함을 외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기분이 묘하다. 단 몇 년 사이임에도 참 여러 궤적을 그어왔다 싶다. 그 간의 경험들이 방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가 풀어낼 이야기도 많아졌을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가 바라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계속해서 전하고 사람들 마음에 크고 작은 울림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