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미ㄹㅗㅓ
세상은 아직도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모른 채 따듯한 바람을 흘려보낸다. 이런 바람을 맞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옥상 난간을 넘어 위태롭게 서있다.
생각이 깊어져도 내 한숨에 담긴 수많은 의미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더 움직이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일까 바람은 더욱 따듯해지고 차갑게 얼어붙은 내 손과 발을 녹인다. 마치 떨어지기 쉽게 도와주는 것 같이.
점점 살아나는 몸의 감각에 잊혔던 마음속 두려움이 내게 다시 몰려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두려움이다. 여태껏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왔던 내가 이 두려움을 다시 느낄 날이 올진 몰랐다. 아니,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오늘부로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말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앞으로 발을 내딛기로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이제 다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
나는 그대로 앞으로 몸을 숙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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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시끄럽다. 죽을 때 까지도 세상은 날 괴롭힌다.
눈이 부시다. 나는 어두운 곳이 좋은데 꿈을 포기한 지는 오래됐는데.
나의 다짐은 한낱의 객기였을 뿐이었다.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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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떠졌다. 나의 모습은 환자복을 입은 채 흰색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미라 같은 모습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르는 여자는 나를 보고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간호사인가. 시간이 꽤나 지났을 무렵에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와 함께 내게로 왔다. 이 남자는 의사인 것 같다.
의사는 현재 내 정신 상태에 대해 확인하고자 몇 가지 간단한 진료를 보고는 옆에 있는 간호사를 보며 괜찮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온몸이 쑤신다. 정신이 돌아올수록 몸의 구석구석까지 아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의사는 내게 말했다.
"장기 기억 상실증입니다. 지나가던 시민분 말로는 다행히도 큰 나뭇가지에 한 차례 걸친 뒤 떨어졌다고 합니다.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장기기억상실증? 도대체 왜?
나는 내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이름과 생일 같은 간단한 질문을 몇 개를 마치고 나서 내가 괜찮을 때에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당연히 내 이름과 생일 같은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은 괜찮았다. 나는 곧바로 퇴원을 원한다고 말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병원 밖의 거리는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다.
나는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주민등록증에 있는 주소를 보고 여기로 가달라고 기사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지갑에는 다행히도 50,000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었기에 무사히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음. 그러니까 504 호면 5층인가?"
문제는 집의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도어록 전문 가게에 찾아갈까 고민을 하다 일단 비밀번호를 대충 찍어보기로 했다.
"자, 보면 내 생일이, 1025"
'삐삐'
"그럼 주민번호 뒷자리로 해보자"
'삐삐'
"음 그럼 여기가 504호니까 0504"
'삐삐'
유추할 수 있는 숫자들은 정답이 아니었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도어록 가게로 찾아가기로 했다.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 하나만 더 해보자는 마음이 들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역시 난 감이 좋다니까'라며 혼잣말을 이어한다.
"그나저나 0000이라니 내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