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시간 날 때 보자”

by 씀씀이

인간관계에 대하여 생각을 하다 보면 소홀해진 관계들이 생각이 난다. 한때는 하루 종일 붙어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먹고 놀던 친구들도 시간이 흐르자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몸도 마음도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연락도 끊어진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단톡방에 설날 연휴 중에 만나자는 톡이 올라왔다. 남자들만 있는 단톡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시원찮다. 나중에 물어보면 그런 말이 있었냐며 다시 묻는 일도 다반사다. 이번에도 역시나 반응이 지지부진했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했고,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나 싶었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인가. 내가 가운데서 조율하는 역할을 했는데 속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서로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오라 하고(이유는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타협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얘네만 이런 건지, 남자들만 모인 톡은 대체로 이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러다 못 만나겠다 싶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보낸 톡에 모임이 무산되었다.


목적이 없으면 만날 이유가 없는 걸까. 만날 이유가 없으면 시간을 못 내는 건가. 저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톡을 보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톡을 읽고 쓸쓸했다. 힘이 쭉 빠져서 나도 더 이상 만나자고 만나자고 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만남'이라는 건 다음이 없다. 오늘 만남이 끝나면 또 언제 볼지 기약이 없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 투성이다. 상대가 어떤 신변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내가 바쁠 수도 있다. 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볼 것 같은 만남도 하루 사이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는 투자한 만큼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효율성”이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순수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목적'이 있어야 하고, '이유'가 있어야 했으며 이 시간을 투자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따졌다. 하지만 어떤 인간관계든 효율을 따질 수 없다. 효율은 기계의 생산성에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 인간의 행동에는 적용하기가 어렵다.


인간관계나 사랑이나 그런 점에선 똑같다.

효율성과 이성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주면 좋고, 못 받아도 좋고, 받으면 더 좋은 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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