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 하러 왔습니다.

24.03.02.SAT

by 이헤윰

제주에서의 둘째날이다.

첫 날은 공항 근처 캡슐 호텔에서 하루 묵고, 오늘 리조트에 체크인 하기로 했다.


어젯밤 USB에 꽂아둔 선이 과열됐는지, 휴대폰 충전기가 고장났다. 화방에 들러 재료를 사고 숙소까지 가야하는데 막막했다. 비행기에서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싶어 가져온 휴대폰 공기계의 힘을 빌렸다. mp3 용도로 가져온 것인데, 지도로 쓸 수 있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와이파이가 터지는 장소를 찾았다. 기록해둔 길을 캡쳐해 지도 사진을 보며 화방을 찾아갔다. 왁구를 몇 개 구매했다. 15호 정사각형 정왁구 4개, 그리고 구석에 있던 작은 세로 왁구 1개. 미리 찾아보았을 때에는 버스 배차가 길어 걱정 했는데, 가장 우려 했던 버스가 기다린 지 3분만에 정류장으로 왔다. 미리 떠안은 걱정은 허상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안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느렸다. 모든 면에서 느린 사람이다. 걸음을 내딛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껏 그 여유를,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도심에서 벗어나자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높은 빌딩 대신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그리고 녹음이 짙은 밭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시내 버스에 아주 큰 캐리어와 좌석에 비하면 결코 작지 않은 나무 왁구를 들고 타는 행동이 민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숙소로 가기 위해 찾은 버스는 그것 뿐이었다. 초행길이기에 다른 경로를 찾기 무서웠다. 택시로 가기에도 먼 거리였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제주에서의 일상과 바쁜 여정 중에 나라는 걸림돌이 갑작스레 나타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다정한 침묵은 나에게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던 중, 올레 12번길을 만났다. 올레길을 주욱 따라 가고 싶었지만, 일단 이 무거운 짐을 어서 숙소에 풀어 정리해야 했기에 왼쪽 길로 들어갔다. 평탄하고 아름답던 올레길 대신 진흙탕이 있는 거친 길이 나타났다. 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그래도 잘 다듬어진 길보다 울퉁불퉁한 길이 더 마음에 들었다. 무거운 백팩과 캐리어에 단단한 나무 왁구까지 모두 이고 1시간 가까이 걸었다. 짐이 없었다면 30분이 걸렸을 거리였다. 그래도 좋았다. 중간중간 쉬며 서서 드넓은 자연을 바라봤다. 바퀴를 끌 수 없는 웅덩이가 나올 때에는 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캐리어를 들었다. 우연찮게 나타난 좁은 골목들 사이로 삐져나온 나무들을 지나치기 어려웠다. 그럴 땐 짐을 놓은 채 폰만 들고 기어코 들어가 사진을 찍고 나왔다.


운동화가 진흙 투성이로 변했다.


리조트 로비에 들어서자 매끈한 바닥과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내 신발에서 떨어진 진흙이 바닥을 더럽혀 민망했다. 죄송하다는 말에 직원 분들은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걸어오시는 줄 알았으면 픽업을 나갔을거라며 다음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달라 하셨다. 같은 날 체크인을 하시는 작가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팀장님께서 나오셔서 셋이 함께 계약서를 작성하고 시설을 둘러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직원분들이 작가라는 이유 하나로 따듯하게 대해주셨다. 아무것도 못먹고 왔을거라며 먹을 것을 올려주시기도 했다.


토요일 저녁마다 포틀럭 파티가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 진행 후 작가님들이 상주하셔서 매 주 여신다고 했다. 이번 파티는 새로 입주하신 다른 작가님과 나를 환영하는 파티도 겸하신다고 했다. 각자 다양한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 보자마자 내 꽃무늬 조끼를 탐내던 분도 계셨다(꽃무늬 조끼는 내가 아끼는 물건들 중 하나인데, 우리 할머니께서 선물해주신 조끼였다.). 즐거운 분위기는 기분을, 행동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나의 아끼는 물건을 알아봐주신 분의 혜안에 흔쾌히 빌려드렸다.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시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파티는 숙소 내부의 카페에서 진행됐는데, 시간이 지나 모두 흥이 오르셨는지 바깥 마당으로 스피커까지 가지고 나가 춤을 추셨다. 순간 작년 캄보디아에서 작별 하며 우는 현지 친구들을 달래다가, 다같이 춤을 추자는 말이 들려와 느닷없이 따라 들어가 춤을 추던 상황이 생각났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춤은 같이 추지 못했다.

사진과 영상은 열심히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