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일, 발목이 나아졌다 심해졌다 무한반복

by 이흥재

2018년 10월5일 (금요일), 맑음


오늘아침에는 어제 저녁에 먹을 음식을 사면서 함께 사온 엠파나다(Empanada, 빵 반죽 안에 다양한 속재료를 넣고 반죽을 반으로 접어 굽거나 튀긴 스페인 전통요리)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주방에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배낭에 넣어 갖고 다니던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게 대강 잘라서 먹으면서, 목이 말라 과일과 주스를 함께 먹었다. 그저 배가 부르면 아쉬울 게 없다.


내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방이 캄캄했는데, 아침을 먹고 다시 숙소로 올라가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날 채비를 하느라고 불을 환하게 켜놓았다.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를 막 나서려는데, 남녀 둘이 카미노를 찾고 있었다. 어제 미리 카미노를 확인해 놓았었기 때문에 쉽게 알려줄 수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현지주민이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오늘의 카미노는, 목적지인 카리온 데 라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로 향하는 포장도로 옆으로 곧게 뻗은 비포장길을 따라가면 된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어서 크게 불편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지루한 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늘 혼자 가는 길이어서, 지루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길이나 마찬가지다.


따로 샛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두워도 발 밑만 조심하면서 걸으면 된다. 그런데, 첫 마을인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ón de Campos)를 지나면서 길이 두 갈래가 되었다. 지도를 보니 한 곳은 실선(實線)이고, 다른 한곳은 점선(點線)이다. 그러니까 어느 길로 가든가 상관없다는 거였다. 실선으로 표시된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려는데 뒤따라 오던 여자가 그곳이 아니라고 했다.

“I don’t care.”
그 여자도 잠시 후에 내 뒤를 따라왔다.


첫번째 휴식처인 비야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 마을의 바에 들어갔는데, 주인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런 곳에서 한국말을 하는 스페인 여자를 만나다니!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사연을 들어볼 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또 다른 한국말도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계산하면서 한국에서 갖고 간 탈춤카드 한 장을 기념으로 주었다. 뭔가 고마울 때마다 주려고 준비해서 갖고 다니던 거였다. 비싸지도 않으면서 가벼운 걸로 준비하느라고 카미노에 오기 전에 서울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쉽지 않게 구입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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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감동이다. 우연히 몇 마디 배운 게 아닌 듯하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 여자도 바쁘고 나도 서둘러 가야 해서 아쉬움만 남긴 채 바를 나섰다.


바를 나와서 카미노를 걷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일본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전에 일본여자를 만난 적은 있었는데, 일본남자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오늘처럼 싸늘한 날씨에 정말 용감하다. 그 남자는 아마도 내가 일본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그렇지만, 서로 영어가 짧으니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그 사람은 나보다 빠르게 앞서 걸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같은 숙소(Albergue Santa María del Camino)의 위 아래 침대를 쓰게 되었다. 역시 대화는 길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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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날씨가 추워서 커피만 마셨기 때문에,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바로 전 마을인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셨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la Blanca) 앞에 순례자 복장을 한 조각상이 있었다. 옆에 의자도 있길래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오랜만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사진이 잘 찍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찍어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서 내 사진은 거의 찍을 기회가 없다. 그저 며칠에 한번 기회 있을 때만 찍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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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목적지까지는 5km 정도 남았다. 역시 카미노는 포장도로 옆으로 이어진다. 3km쯤 남은 지점에서 목적지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은커녕 언덕도 거의 없어서 멀리서도 목적지가 보이는 거였다. 이 또한,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저 한발씩 앞으로 나갈 뿐이다.


그렇게 걸어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는 왔는데, 이제 숙소를 찾아야 한다. 특별한 정보는 없었지만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은 있었다. 그곳을 물어서 찾아가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12시에 연다고 하니 아직 1시간 남짓 더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는 동안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이제 비누를 하나 사야 한다. 어제, 빨래를 한 후에 깜박 잊고 비누를 그대로 놔 두었었는데, 아침에 보니 비누곽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오늘 당장 빨래하고 샤워하려면 비누가 필요하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주인이 알려준 대로 한참 걸어가니 슈퍼마켓이 있었다. 스페인어로 ‘가게’를 티엔다(tienda)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 큰 규모의 슈퍼마켓(Supermercado)이 있는데, 이 또한 ‘슈퍼마켓’이라는 간판을 붙여 놓은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그저, 티엔다나 슈퍼마켓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가르쳐 준다. 그렇지만, 찾기가 쉽지는 않다. 마을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구석에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그마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문을 닫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렵다.


티엔다를 찾는 이유는 주로 과일과 물을 사시 위해서다. 물은 바에서도 팔고(가격은 최대 5배 이상 차이가 난다), 과일도 가끔은 바에서 팔지만 일정하지 않아서 가게에서 사는 게 편하다. 아무튼, 그럭저럭 적응해 간다.


점심을 먹고 비누까지 사서 다시 숙소(Albergue Santa María del Camino)로 돌아오니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는데, 두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배낭을 세번째로 놓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더 왔다. 그런데, 12시가 되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냥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씩 인적사항을 기록하면서 침대를 배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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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에 있는 알베르게는 대부분 남녀 혼용이지만, 이 알베르게는 남녀가 구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숙소에 일찍 도착하면 아무래도 조금 더 맘에 드는 위치의 침대를 배정받을 수 있어서 좋다. 오늘도 역시 위치가 꽤 맘에 들었다. 이제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일기를 쓰고 저녁 먹을 일만 남았다.


마침 알베르게를 찾으면서 봐 두었던 식당이 있었다. 간판에는 태극기와 함께 한글도 쓰여 있었다.
“오늘의 메뉴(Menú del Día)”
가격도 11유로면 적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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