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8일 화요일 맑음
요즘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와서 난리인데, 다행인지 서울은 오늘도 맑아서 산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더우니 가까운 곳엘 다녀오기로 하고 정한 목적지는 아차산과 용마산이다. 두 산 모두 낮은 데다,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 몇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거리도 가깝다.
그래도 산에 가는 날 아침 기상시간은 늘 한결같다.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개롱역으로 가서 잠시 기다렸다 지하철을 타고 광나루역에서 내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後 곧바로 아차산으로 출발한다.
광장초등학교를 지나는데 담벼락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가 쓰여있다. 분명 한시(漢詩)일 텐데, 원문을 찾진 못했다. 서거정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대사헌대제학과 6조 판서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올랐으며, 그의 호인 사가정(四佳亭)은 지하철 7호선 역명으로 쓰이고 있다.
절간이 어디인가 저 멀리 흰구름 속에 보인다.
산 그림자 지는 곳에 객은 말을 타고 가고
가을소리 들려오는 곳에 중이 종을 두드린다.
단풍숲은 붉기만 하고 강물은 푸르게도 흐른다.
언덕 저쪽에 촌가 조용하니 돌아갈 마음이 죽처럼 진하다.
서거정은 공무든 사적으로든 광나루를 자주 오갔는데, 위 시는 광나루를 건너면서 멀리 있는 범굴사(峨嵯山 梵窟寺)를 바라보며 지은 시라고 한다.
아차산 입구에 다다랐는데 공사 중이어서 인도(人道)가 막혀있다. 화살표를 따라 연못 있는 곳으로 내려가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하긴 어차피 이 길로 가려던 참이긴 했다. 짧은 계단을 내려서니 작은 연못 한가운데 나무다리가 놓여있는데 오른쪽엔 화강석으로 만든 인어동상이 있고, 왼쪽에는 연잎이 무성하다. 전에는 분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차산 종합안내판 오른쪽에 난 길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너무 더운 날씨라 그런지 초입부터 땀이 흐른다. 그런다고 포기할 순 없으니 땀을 닦아가며 한발씩 올라간다. 오른쪽으로는 완경사 도로를 만들어놓긴 했지만, 이왕 땀 흘리러 왔으니 가파른 계단을 따라간다.
조금 오르다 보니 아차산성(峨嵯山城) 안내문이 보인다.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돼있는 아단성(阿旦城) 또는 아차성(峨嵯城)이다. 이 성은 백제 책계왕 28년(286) 수리했으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고,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 아래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사료를 찾아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阿且城(아차성)’으로 나오는 반면, 온달열전에는 ‘阿旦城(아단성)’으로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且(차)’와 ‘旦(단)’이 비슷한 데서 오는 판각(板刻) 오류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원래 음은 ‘차’였을 것이다. 이는 이후 사료에서 한자는 다르지만 계속 ‘아차’로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고려사> 제신열전에는 ‘峩嵯山’으로 나오다가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부터는 줄곧 ‘峨嵯山’으로만 나온다. 예를 들어, <고려사> 제신열전 조운흘(趙云仡) 조를 보면,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하야에 장사 지냈다 (而葬于古楊州峩嵯山南摩訶耶)”고 했다.
아차산 줄기는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연결돼있는데, 조선시대까지는 이 전체를 아차산이라고 했으며, 능선에는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堡壘)’가 있다. 보루는 300m 이하의 작은 성곽으로,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일반성곽과 달리 주로 교통로나 요충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아차산 일대에는 20여개 보루가 있다.
갈림길에서 왼쪽 대성암 방향으로 향한다. 오른쪽 계단을 따라 가면 가파른 암반과 함께 해맞이광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려올 때 지날 예정이다.
대성암에 잠깐 들렀다. 종각(鐘閣)과 삼성각(三聖閣),대웅전(大雄殿)과 조그만 요사채가 있는, 옹색한 절터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입구에는 스테인리스 철판에 새겨놓은 안내문이 있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글자를 알아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한자 한자 살펴보니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사암(寺庵)은 670년경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으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武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나 빙거(憑據)를 찾기 어렵다. 1921년 안보광 화상(安寶光 和尙)이 관음기도 後 서몽(瑞夢)을 받고 이 산을 찾아와 석굴을 발견하고 범굴사(梵窟寺)란 암각문을 확인했다. 그는 폐허 된 사지(寺址)를 인수해 법당과 요사(寮舍)를 짓고 관음대성의 계시를 받았다 하여 사명을 대성암(大聖庵)으로 개칭했다. 한국전쟁 때 전파(全破)된 것을 1978~1981년 재건축했지만, 1992년 전소(全燒)된 것을 1992~1996년 다시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찰이름은 ‘대성암’것인데, 일부 이정표에는 왜 ‘범굴사’로 바꿔 놓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굳이 ‘구 대성암’이라고도 써놓았다.
대성암을 나와 산스장을 지나 가파른 암반을 오른다. 옆에 밧줄이 있어 그나마 의지하며 오를 수 있다. 그래도 워낙 가파르니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그대로 미끄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차산 보루들을 몇 개 지나 아차산 정상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곳은 해발 300m가 되지 않는 낮은 산이라 정상표시가 없다면 이곳이 정상인지도 모른 채 지나칠 정도다. 그래도 정상표시 사진은 한장 남긴다.
07시44분, 아차산 끄트머리에 있는 치(雉)에 도착했다. 안내문을 보나,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성에서 치간 거리는 화살 유효사거리인 80m 정도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에서는 치 사이 간격이 매우 좁다. 아차산 4보루에 5개, 홍련봉 2보루에 7개가 있을 정도다. 이는 치가 방어기능과 함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보강구조물 기능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를 지나 용마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제서야 아차산 정상이 봉긋하게 보인다. 산세가 완만하게 지나올 때는 잘 몰랐는데.
용마산까지 가려면 중간에 이름 없는 봉우리를 하나 더 지나야 한다. 높진 않지만 오늘이 더운 날이라 땀이 많이 난다. 그래도 가끔 부는 바람이 조금은 시원한 느낌이다. 그리고, 8시6분, 용마산 정상에 도착했다.
주위에 몇 사람이 있긴 해도 굳이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기 곤란해서 정상석 사진만 찍고 말았다. 정상석 뒤에는 ‘용마산 대삼각본점’이 있는데, 설명문을 보니, “이 삼각점은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서울지역에 설치한 2개 대삼각본점(1등 삼각점) 중 하나로, 1994년 7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정비했으며,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고, 현재는 <세계측지계> 도입에 따른 측량기준점으로 이용된다.”
정상에서 내려와 산스장 옆 나무벤치에 앉아 이온음료와 에너지바를 먹었다.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긴 해도 별로 시원하질 않다. 곧바로 하산이다.
다시 아차산 정상을 지나 해맞이광장에서 사진 한장 찍고 망원경으로 멀리 롯데월드타워를 본 後 고구려정(高句麗亭) 쪽으로 내려간다. 안내문에 따르면, “본래 있던 팔각정이 노후화돼 2008년 1월 철거하고 고증과 자문을 거쳐 2009년 7월 다시 짓고 ‘고구려정’이라고 했다. 금강송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고구려 전통양식의 배흘림식이며, 기와는 고구려 궁궐인 평양 안학궁터와 아차산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붉은 기와를 참고했다.”
인공폭포와 ‘아차산 토요 한마당’ 무대를 지나 등산로 입구에 오니, 아차산 한자(漢字) 표기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아차산과 아차산성 표기는 보통 ‘峨嵯山’‘峨嵯山城’으로 한다. 아차산성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 <광개토왕비>(414)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돼있다. 여기서 ‘阿旦’은 한자의 소리(音)를 빌어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阿且城’으로도 표기되면서 ‘阿旦’보다 ‘阿且’가 많이 쓰였다.
‘旦’과 ‘且’가 금석문이나 판각인쇄에서 흔히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旦’ 자가 조선 태조의 나중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避諱)해서 ‘且’로 썼다는 주장도 있지만, 피휘할 경우 같은 뜻의 다른 글자를 택하므로 피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려 후기부터 본래 ‘아차’에 뜻(訓)을 부여한 ‘峨嵯山(또는 峩嵯山)’이 쓰이면서 현재까지도 ‘峨嵯山’‘峨嵯山城’으로 표기한다. ‘峨’와 ‘峩’는 모두 ‘산이 높다’는 뜻의 같은 글자며, ‘嵯’는 ‘우뚝 솟다’란 뜻이다. 다만 아차산성의 경우 문화재청이 197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阿且山城’으로 표기하면서 공식 문화재 안내문에는 이를 따르고 있다.”
더위를 무릅쓰고 오늘도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