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31일 토요일 맑음
이런저런 일로 3주 만에 다시 산행을 나선다. 오늘은 한양도성 순례길이다. 출발지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그리고 흥인지문(興仁之門)과 남산을 거쳐 숭례문(崇禮門)에 이르는 코스다.
오늘도 개롱역에서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4호선을 갈아탄 後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린다. 4번 출구로 나가 길건너 아직은 조명등이 밝혀진 혜화문(惠化門)을 한번 쳐다보고 왼쪽으로 난 나무데크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벌써 아침 7시 반이 가까워 오는데도 주위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기 않았다.
드문드문 설치된 각자성석(刻字城石)과 시대별로 달리 쌓은 성벽을 구경하면서 걷는다. 각자성석은 축성관련 기록이 새겨진 성돌로, 천자문 (千字文)으로 축성구간을 표시(14세기)하거나, 축성을 담당한 지방이름을 새기기도 하고(15세기), 축성 관리책임과 석수이름을 새기기도(18세기) 했다. 한양도성에는 280여개 이상의 각자성석이 있다고 한다.
성돌 모양도 시기별로 달라졌는데, 태조 때(1396)는 산지는 석성(石城), 평지는 토성(土城)으로 쌓으면서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했다. 세종 때 (1422)는 평지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성동을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했으며, 숙종 때(1704)는 성돌크기를 40~45cm 방형(方形)으로 규격화했다. 그리고 순조 때(1800)는 60cm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 하지만, 최근에 새로 쌓은 성돌들이 많아서 시대구분 하는 게 쉽진 않다.
장수마을을 지나 첫번째 인증사진 찍을 낙산공원에 도착했는데, 지나는 사람이 없어 셀프로 몇 장 찍어보니 역시 얼굴만 크게 나오고 배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기다렸다가 지나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간신히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럴 땐 셀카봉이라고 있으면 좀더 수월하게 찍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낙산(駱山)은 남산인왕산북악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을 이루는 산으로, 낙타를 닮아 낙산 또는 낙타산(駱駝山)으로 불렸고,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직영 목장인 우유소(牛乳所고려)나 타락색(駝酪色조선)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오랜만에 성벽 너머로 일출을 바라보며, 벽화로 유명한 이화(梨花) 마을을 지나 흥인지문으로 향한다. 이화마을은 조선시대 쌍계동(雙溪洞)으로 불렸으며,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도시예술 캠페인 지역으로 선정돼 벽화가 그려졌지만, 수많은 방문객들로 인해 사생활침해 등의 문제가 일어나 2016년부터 일부 벽화가 철거되기 시작해, 지금은 많이 퇴락한 모습이며, 찾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흥인지문공원(興仁之門公園)을 지난다. 이곳은 이전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 등이 있던 곳으로, 2014년 동대문 성곽공원(東大門 城郭公園)으로 개장했다가 2018년 흥인지문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한다.
신호를 기다렸다 길을 건너 흥인지문에 도착해, 첫번째 스탬프를 받는다. 물론, 앱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종이가 비치돼있긴 하지만 갖고 다니는 게 번거로워 편리하게 앱으로 받는 중이다.
흥인지문의 원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 또는 동대문(東大門)이다. 즉,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1396) 9월24일 기사를 보면, “각 문의 월단누합을 지었다(作各門月團樓閤)”고 하면서, “ 정동은 흥인문이니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라고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흥인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조 1년(1455) 10월20일 기사다. “병조에서 아뢰길, ‘취각 할 때의 조건은, 5사는 광화문 앞길에 서는데, 많으면 종루와 흥인지문까지 이릅니다(兵曹啓吹角時條件, 五司立於光化門前路, 多則至于鍾樓興仁之門).”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 옆에 있는 이간수문(二間水門)을 잠시 구경하고 광희문(光熙門)으로 간다. 광희문도 1396년(태조 5년) 지어지면서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했는데, 나중에 시구문(屍口門)이란 별명이 추가됐다. 한양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지금 문은 1975년 본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고쳐 지은 것이다.
신라호텔 담장으로 끼고 오르는 성곽길을 지나 반얀트리 호텔과 국립극장을 거쳐 남산으로 오른다. 포장도로를 잠시 오르다 이내 나무데크 계단을 만난다. 누군가 친절하게 계단 수를 표시하다 중도에서 그만뒀다. 그래도 끝까지 오르려면 얼추 700여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리고도 남산 꼭대기까지 가려면 급경사를 한참 더 올라야 한다.
오전 9시30분쯤,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남산팔영(南山八詠) 중 한곳인 척헌관등(陟巘觀燈)에 도착했다. 남산팔영은 조선 태종 때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를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남산의 8가지 빼어난 경치와 조망에 대해 읊은 시로, 척헌관등은 초파일(음력 4월8일) 남산에 올라 연등을 구경한다는 뜻으로 전문은 이렇다.
八日觀燈盛 4월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昇平第幾春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萬龕明似晝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四境靜無塵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虹焰蟠千丈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星芒拱北辰 별 광채 북두칠성으로 향했네.
通宵看未足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不覺到鷄晨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남산팔영은 ① 운횡북궐(雲橫北闕 구름이 흘러가는 경복궁 운치) ②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철에 물이 넘쳐 흐르는 한강풍경) ③ 암저유화 (巖底幽花 바위 틈새 피어있는 그윽한 꽃들) ④ 영상장송(嶺上長松 언덕 위 큰 소나무 전경) ⑤ 삼춘답청(三春踏靑 봄날[음력3월] 남산 나들이) ⑥ 구일등고(九日登高 중양절[음력 9월9일] 남산 오르기) ⑦ 척헌관등 ⑧ 연계탁영(沿溪濯纓 계곡에 갓끈 씻는 선비들 운치) 등을 말한다.
동남아에서 온 듯한, 아이들도 포함된 단체관광객들이 보인다.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인증사진 찍느라고 정신 없는데, 오늘은 춥긴 해도 날씨가 화창해서 구경하기엔 좋은 날이다.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잠시 바라보다, 팔각정으로 가본다. 이곳은 전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남산은 본래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는데, 목멱은 ‘큰 산’을 뜻하는 마뫼 또는 말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1395) 12월29일 기사를 보면, “이조에 명해 백악을 진국백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아, 경대부와 사서인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했다(命吏曹, 封白岳爲鎭國伯, 南山爲木覓大王, 禁卿大夫士庶不得祭.)”고 했다.
남산주위에는 자물쇠를 걸어놓은 울타리들이 아주 많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2005년 남산타워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되면서 절벽에 로프테라스를 설치했는데, 이곳을 방문한 연인들이 로프에 자물쇠를 걸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곳에는 2006년 한 커플이 이곳에 자물쇠를 매달고 이것이 방송을 타면서 열풍이 일어난 데서 시작됐다는 내용도 있다. 아무튼, 20년 정도 지나는 동안, 이제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자물쇠가 걸려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제 봉수대(烽燧臺) 앞에서 두번째 인증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지나는 사람이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누군가 보여서 얼른 부탁했다. 마음에 썩 드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그것만도 어디냐! 혼자 찍은 것에 비해선 훌륭하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 봉수가 집결됐던 곳으로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렸는데, 다섯 곳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1993년 김정호의 <청구도 (靑邱圖)> 등을 참고해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자물쇠를 팔고 있는 가게 앞 나무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에도 여러 국적 사람들이 남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커플이 없어서인지 자물쇠를 사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숭례문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10시20분 숭례문 앞에 도착해 두번째 스탬프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 숭례문 사진을 찍는다. 오랜만에 날씨도 좋고 지나는 사람도 없어 사진 찍기에 좋았다.
숭례문은 태조 5년(1396) 한양도성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숭례문 앞 안내문에는 ‘태조 7년’으로 돼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5년 9월24일 기사에 “정남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했다[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고 했다). 그 後 세종 30년(1448), 성종 10년(1479)과 고종 때 크게 수리했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한양 출입문으로 매일밤 인정(人定 10시쯤)에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파루(罷漏 새벽 4시쯤)에 열었는데, 문루(門樓)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응급복구작업을 했고, 1961~963년 전면해체 복구작업을 했다. 2008년에는 방화사건으로 건물 전체가 크게 훼손돼 2013년 4월까지 복구작업을 했는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원했다.
구경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가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탄 後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