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한 일처리, 정말 나도 스마트해질까?
7년째 UI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프리랜서를 겸하다가 현재 다시 IT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안정감도 잠시, 5개월 만에 다시 이게 맞는 걸까?라는 고민과 퇴사 후를 벌써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하지만 준비 없이 퇴사한 후의 일시적인 해방감 뒤의 불안을 경험했기에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금 기간을 잘 활용하며 설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수백 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의 디자이너로 있으면서 동물원의 맹수처럼 생기를 잃고 창의성이 더 줄어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 반복되는 일들을 자동화하고 매뉴얼화하는데 열심인, 그래서 효율적인 업무를 추구하는 이 회사가 꽤 신선하게 보였다. 하지만 6개월째 접어들며 조금 다른 것들이 보이고 이 체계에 길들여지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회사의 형태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마트한 일처리를 위한 장치들, 과연 우리 개인을 스마트하게 만들까? 하는 의문에서 몇 가지 짚어본다.
(디자인 직무를 하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회사는 jira라는 일정관리 툴을 사용한다. 물론 이 툴은 사용하기에 따라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한 좋은 서비스임엔 틀림없다. (언제나 툴은 툴일 뿐 죄가 없으니) 업무가 개인에 할당되면 알림이 오고 내용 확인 후 예상시간을 기입한다.
- ABC고객센터 UI 개선 : 1d 2h
- 버튼 디자인 : 0.5h
이런 식으로 시간, 분 단위로 개인이 정하지만 암묵적으로 이런 건 몇 시간, 저런 건 몇 시간 정해져 있다.
작업을 시작하면 작업 중에 체크, 끝나면 완료로 체크. 이런 현황을 팀장이 jir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을 마치면 실제로 소요된 시간을 기재하는데 이를 '워크 로그'를 남긴다고 한다. 예상시간보다 더 걸리기도 하고 일찍 끝날 때도 있는데 더 걸린 경우는 히스토리를 기입한다. 이 워크 로그는 대략 이 일은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구나 하고 파악하기 위함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체계가 있기에 구두로 갑자기 던지는 일들이 없고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득 이런 습관이 들어버리면 점점 기계에 가깝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는 시간 대비 아웃풋이 명확한 일이라면 몰라도 창의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위험한 장치가 아닐까.
사람이 가진 감각과 혁신적인 생각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일을 할 때는 잘 발휘되지 않는 법이다.
중간의 비는 시간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개개인의 개성이 살아있을 때 좋은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회사는 모든 사람이 일정 속도로 일정 퀄리티를 내는 안정성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말로는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 실행은 그걸 방해하는 체계이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이 메신저와 메일로 이루어지는데 업무가 연결되어있는 기획자분의 얼굴도 본 적 없는 경우도 많다.
작업이 끝나면 알리는 글을 남기고, 필요하면 메신저와 메일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마지막에 꼭 저 문장을 붙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사실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붙이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개성이 듬뿍 드러나는 화법으로 캐주얼하게 쓴다면 오고 가는 멘트 속에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요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처럼 감정이 배제된 어투로 온라인으로 대화를 하고 덕분에 사람에 치인다는 느낌이 없어서 편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할 필요 없는 형식적인 멘트들로 하루 8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내 안의 인간적인 감정들은 고스란히 굳어지는지도 모른다.
누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둬도 아무 지장 없이 업무가 진행될 수 있도록 사내 wiki에 매뉴얼을 만들어 둔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알아야 할 것들도 40여 가지 항목들이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각 항목마다 관련 자료들도 모두 링크되어 있다.
대부분의 디자인 업무들도 매뉴얼, 가이드가 명시되어 있고 잘 되어있지 않은 부분은 매뉴얼 만들기에 따로 시간을 할애해서 '일을 위한 일'을 하곤 한다. 구두로 전해졌을 때의 오류를 줄이고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조차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매뉴얼화를 좋아하는 회사이다.
이는 디자인 업무에 국한된 이야기인데 물론 다른 일에도 비슷한 원리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만들어지는 웹, 모바일, 브로셔, 로고 등 모든 디자인 작업물에는 일관된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들어간다. 웹사이트 하나만 봐도 페이지마다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디자인 룰을 만들어서 이 페이지 다르고 저 페이지 다른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되면서 거기에 맞게 일관성 있는 디자인들을 뽑아내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디자인을 시작한 초창기처럼 감성이 듬뿍 담긴 디자인을 이제 잘 못하겠다. 더불어 예민한 감각도 많이 무뎌졌음을 느낀다.
나 스스로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느라 이건 가이드에 안 맞는데 이렇게 해도 되나? 하며 제약 속에서 디자인하는 일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직원이라면 이렇게 일해야 한다' 라는 책을 읽고 감상평을 쓰라고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여기가 중학교인가?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현실. 좋은 책이 있다면 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시켜서 하는 일은 재미가 없고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니까.
2016 직무능력 향상 프로젝트
기본적인 업무 외에 직무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개인별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계획을 구체적으로 작성하여 적합하다고 윗선에서 통과되면 실행. 2016 년도 한 해 동안 하고 연말에 결과물을 보여주는 식이다.
물론 이 기회에 평소에 배우고 싶던 스크립트를 공부한다던지 내 능력 계발의 기회로 생각할 수 도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역시나 숙제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순수한 나의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기에 의무감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연장이 될 수밖에.
당연할 수도 있지만 회사는 직원에게 월급을 주고 최대한 이용하여 이윤창출을 도모한다. 능력을 스스로 계발하도록 조금씩 압력을 주고 동시에 낭비 없이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이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동화와 효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렇게 몇 가지만 보더라도 스마트한 일처리를 위한 프로세스가 우리 자신보다 대규모 조직을 위한 것임을 자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스마트함 때문에 나의 창의성은 거세되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알고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효율성에 영혼까지 물들어버리지 않도록 회사에 있는 동안 겉으로만 받아들이자. 어쩌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회사를 나가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을 기르려면 회사의, 회사를 위한 방식들에 너무 적응하지는 말고 업무시간에 에 할 일하고 무조건 정시퇴근을 하여 빠져나오자.
또 한 가지, 회사에 오래 살아남아 관리자가 되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인가?
무엇이든 수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 정리가 필요해진다. 구조가 필요하고 매뉴얼이 필요하고 관리를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일을 위한 일들이 생기게 된다. 관리는 그야말로 일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 아닐까?
조직이 있어야만 필요한 사람이라면 조직이 작아지고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환경에서는 가장 위태로울 수도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책이 생각났다. 빅브라더에 의한 감시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없애고 적응하는 사람들.. 그 책을 볼 때는 그것이 극단적인 상황인 줄 알았는데 우리 회사의 모습과 자꾸만 겹쳐지기도 한다. 업무효율을 위한 자동화를 탓할 순 없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말랑말랑한 감성과 숨쉴틈을 마련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당연시되는 일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만 의문을 품고, 회사와 분리된 나라는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퇴근 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마음이 즐거운 일들을 찾아서 할 생각이다.
브런치에서 두서없지만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