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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경 Dec 28. 2024

그녀의 다시 시작을 응원합니다

- 정리하며 만난 사람들

아침 9시.

고객님 댁 현관문이 열리면 으레 쭉쭉 들어가면서 줄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현관문은 열렸으나 좀처럼 줄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겨우 인턴이었던 내가 줄의 거의 끝자락쯤에서 ‘이게 뭔 상황일까?’ 고개만 빼꼼히 내놓고 궁금해하던 차에 전달된 소식은 고객님이 울고 계셔서 잠시 지체되고 있는 거라고 했다.


팀장님이 먼저 들어가셔서 고객님을 진정시킨 후 어찌어찌 현관에 들어섰는데, ‘아…’ 외에는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는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은 청소기가 작동된 적 없을 듯싶어 보이는 바닥엔 과자 부스러기, 비닐봉지, 벗어 놓은 옷가지, 널브러진 살림살이. 뭐 하나 정상적으로 자리 잡고 있어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은 부푼 가슴으로 일터에 나오는 햇병아리 인턴이 감당하기에는 뭐라 말이 안 나오는 너무나 벅찬 환경에 ‘아.. 큰일 났다 어떡하지?’ 태산 같은 걱정이 밀려왔다.


그래도 선배님들 따라 주섬주섬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주워 쓰레기와 빨랫감과 정리되어야 할 것들로 분류하고 나니 처음엔 안 보이던 바닥이 서서히 드러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눈물로 우리를 맞으셨던 고객님도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이 되시고 바닥이 보이니 기분도 점점 나아지시는 듯 보였다.


시간은 흘러 오전 작업이 마무리되고 바야흐로 즐거운 점심시간.

맛있는 찌개를 먹어가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데 우리 고객님 알고 보니 완전 엘리트 코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최상위 대학을 나와 최고의 직장을 다니면서 정말 부러울 게 없는 날들이었는데 세상에나 남편이 초등 동창과 바람이 나서 아직 어린 아들 둘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해야 할 사람의 배신이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실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간단한 말로는 절대로 표현이 안 될 그 어떤 상황을 겪으셨을 테지.

청소 안 된 바닥도, 널브러진 옷가지도 엉망인 살림살이도 그냥 다 이해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라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의뢰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침에는 너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고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눈물이 났다고 하셨다.

이해되지. 아무렴 천 번 만 번도 이해되지.


저녁에 말끔해진 집에서 고객님은 웃으셨다.

무슨 얘기를 하셨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고객님이 웃으신 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지금 벌써 9년도 넘었고 고객님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가끔 떠올리며 잘 살고 계시겠지? 잘 사셨으면 좋겠다 기원을 한다.

그때 그녀의 다시 시작에 나도 있었던 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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