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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경 Jan 01. 2025

어떤 게 더 중요할까요?

- 정리하며 만난 사람들

몇 해 전,

견적을 원한다는 연락을 받고 일산으로 향했다.

현관문이 열리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과상자 산성? 집 안에 그런 게 있었다.

이상함을 넘어서 조금 괴기스럽기까지 한 모습.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몇 년 동안 그 동네에서 버려진 사과상자는 죄다 그 집에 와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사과상자가 현관부터 이어져 거실 좌, 우와 집안 여기저기에 쌓여있었다.

사과상자의 오른쪽 모서리 근처에는 내용물 식별을 위한 7~8cm가량의 네모 구멍이 나 있었다.


60대 정도로 보였던 의뢰인은 본인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딸이 강력하게 원해서 연락을 하게 되었노라 말문을 열었다.

어려서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서 어떤 물건도 쉽게 버리는 걸 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다 끌어안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딸이 집안을 정리하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부득이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했다.


이미 다른 업체에도 연락해서 방문을 했었는데 못 하겠다며 작업을 거절하고 가버린 경험도 있었다.

상담하는 내내 나는 이런 경우 쓰지 않는 많은 살림을 비워내지 않으면 작업을 해도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열심히 설명하며 그럴 결심은 서 있는 건지 여러 번 확인을 했지만 사실 그녀는 아직도 그렇게 비워낼 자신이 없어 보였다.


상자의 구멍 사이로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대략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많은 오래된 가방들이 있었고, 지금은 쓸 수 없어 보이는 부엌살림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지금은 그다지 필요 없어 보이는 살림들이 조금씩 보였다.


상담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확실한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터라 작업일은 확정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나는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과연 당장 쓰지도 않는 이 물건들과 딸의 마음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 꼭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다"는 얘기 밖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그녀도 모르진 않았을 거다. 다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그 공포가 안쓰러울 뿐.


그로부터 이틀 정도 후, 동료들과 잠실 어딘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참에 연락이 왔다.

머뭇거리며 얘기하는 그녀의 전화기 너머로 거의 악을 쓰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이 작업을 확정하지 않아 화가 많이 났다며 그녀는 그렇게 등 떠밀리 듯 작업일을 약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고 30여분쯤 흘렀을까?

그녀의 전화가 다시 왔다. 작업을 취소하고 싶다고.

그런데 혹시 딸의 확인 전화가 오거든 내가 힘들어서 계약을 포기한 걸로 해 달라는 부탁까지 해왔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이 상황이 너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 물건들과 이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끔 그녀와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딸을 생각한다.

딸은 정말로 집을 나가버렸을까?

아님 여전히 사과상자 성벽이 가득한 집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살고 있을까?

혹시 엄마는 나보다 더 잘 설득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성벽을 부숴내고 딸과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

차라리 결말이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 나의 고객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마음을 움직여서 진짜로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된 홀가분 한 날들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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