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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준 Oct 12. 2019

내게 무해한 사람

나는 책을 읽기 전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제목에서 '내게 유해한 사람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얼핏 나에게 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누구도 나에게 유해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행동하고, 그것은 '유해하다.'와 '무해하다.'로 결정될 순 없는 노릇이다. 타인의 재물과 생명을 훼손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곤 평범한 살 속 내게 유해한 사람은 무해한 사람들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 스스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본 소설은 총 7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 중 가볍지 않은 소설은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가장 큰 담론인 페미니즘과 동성애가 소설 속 녹아있었고, 이혼, 죽음 같이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소설 ' 그 여름'부터 작가는 내가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란 망각의 숲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작가는 5페이지까지 내가 주인공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수이는 축구를 하는 아이, 이경은 그 공을 맞은 아이라는 게 전부였다. 나는 수이가 축구를 하는 사실 하나로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6페이지를 넘어가며 수이의 성별은 '자매'라는 표현과 함께 나타났, 작가가 수많은 운동 중 축구를 선택한 이유를 알았다. 이경과 수이가 사랑의 벽을 쌓고 허무는 과정은 여성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이야기하고 있다.

 읽을수록 뭔지 모르게 두 사람의 사랑은 여성과 남성의 사랑과 다를 게 없었으나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만일 수이가 남성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마음속 두터운 편견의 벽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린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이 문장을 난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요즘은 딸을 낳으면 '금메달' 아들을 낳으면 '목 메달'이라는 소리가 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아 남아선호 사상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 '601,602'는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또래의 90년대 여성 이야기를 담고 있다. 효진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하지 못했던 가정 속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빠 기준에게 폭행을 당했다. 부모는 방관을 넘어 효진의 소심한 저항조차 나무랐다. 주영은 그런 효진을 대신해 저항하였지만 사실 그 역시 편하지 못했다. 엄마가 울던 이유, 엄마가 그에게 했던 말은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핵심은 효진의 가정과 큰 차이가 없었다. 주영은 이런 상황에서 애써 자신의 상황이 '효진보다 낫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할머니에서 엄마로, 주영까지 내려온 굴레를 주영은 벗어날 수 없었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남자와 여자 구분 없이 나타난다. 남성에겐  "남자인데 겨우 그거 갖고 그래?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여성에겐 "여자면 조신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을 흔하게 접하곤 한다. 지금까지 십수 년간 받은 교육에선 '남자와 여자는 같다.'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은 없다.'라고 가르쳤지만 인식은 변치 않았다. 나의 선배도 그랬고, 나 역시 그렇고, 나의 후배 역시 그러고 있다. 나는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효진과 주영이 은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소설인 '고백'은 이 책의 제목인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는 진희의 죽음이 비단 주나만의 문제가 아닌 미주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진희는 자신의 오랜 비밀을 이야기하고 얼마 안돼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그는 둘에게 이해받기를 바랐다. 주나에게 막말을 듣고 싶어 한 것도, 미주에게 되물음 받고 싶지도 않았다. 미주는 주나의 막말이 진희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자기보다 조금 더 심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었다. 진희와 '그 여름'의 수이와 이경이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은 결국 이해받았는가 였다. 후자 역시 중학교 선배를 통해 상처를 받았지만 서로를 통해 치유할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참견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닌 그저 이해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 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도 없다. 신뢰했던 사람이 나의 고민을 아무런 일도 아닌 듯, 넘어가거나 희화화 하다면그것은 배신감으로, 스스로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진희는 동성애에 대해 미숙했던, 동성애에 대해 무지했던 미주와 주나에게 죽임당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진희는 살 수 있었다. 적어도 수이와 이경을 만났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서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에게 유해한 사람은 나 스스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었다. 그 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나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의 말,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겐 가볍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장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약자에게 강자와 동일한 잣대를 제시한 적이 없었는가 고민하고 성찰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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