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좋아하기 시작한 건 십 년 이상 품에 안고 가는 사람이다. 그만큼 마음에 쏙 들어오는 일도 적고, 잡은 것을 놓는 일은 더더욱 적다.
“너 아직도 그거 좋아해?”,“어떻게 그렇게 오래 덕질해?” 같은 말은 일상처럼 들었다. 지금도 듣고 있다. 오래 덕질하는 거? 딱히 비결은 없는데. 그냥 시간이 흘렀어...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나를 오래 사랑하면 거기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있다. 나는 항상 그 안정감을 기반으로 덕질하는 사람이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에 포근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내 품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새 덕질. 여자배구. 최고야, 사랑해, 영원하자, 오래오래 볼 게, 매일매일 생각하고, 매일매일 떠올릴 거야.
하나를 오래 사랑하면서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 안정감이 소중한 이유는 내가 불안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랜 우울증은 나에게 별 걸 다 안겨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불안이다.
항상 불안하다. 뭘 해도 불안하고, 뭘 안 해도 불안하다. 대부분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조절할 수 있다면, 건강한 사람이겠지. 나는 그렇지 못한다.
지금은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많이 찾았지만, 불안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내가 찾는 것도 아니고,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 있는지 모르다가 불쑥 나타나서 나를 뒤흔들어 버린다.
그래도 지금까지 열심히 병원 다녔으니까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어림도 없다. 얼마 전 약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어디 감히 괜찮아졌다는 생각을 하느냐, 아직 멀었다...
저러다가 갑자기 터져버리진 않을까? 뜬금없이 툭 튀어나온 불안감에 빨래가 잘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앞을 떠나야 두근거리는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는 나는 ‘불안이 밀려오면 먹으라’고 처방받은 진정제를 항상 껌처럼 씹어 먹었다.
그것도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정해지는데, 그걸 다 먹고도 불안한 날이 양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갓 일 년이 지난 사랑은, 어쩌면 그렇게 오래 안고 지내온 덕질보다도 더 큰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건 아마도 여자배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와 그리 멀지 않을 거다.
갓 일 년이라곤 하지만, 그 전에 여자배구에 관심 가진 적이 있다. 2020년, 코로나로 미뤄져 2021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 4강 신화를 봤다면 안 빠져들 수가 없지.
‘국뽕’이라는 말을 경계하는 사람이지만 항상 올림픽 할 때만 되면 티브이 앞에서 시간 적어두고 경기 지켜보는 나는 당연히 그 앞에 무릎 꿇고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도올 여배 보면 가슴이 웅장해져서 대중교통 이용할 필요도 없다. 부푼 마음으로 하늘 날아서 이동하면 된다, 진짜로. 아니, 저기서 저를 쳐다보시네. 왜요? 제가 도올 여배 4위 하는 나라 사람으로 보이세요?
하지만 그땐 짧은 관심이었다. 대한민국 여자배구가 세계 4등이다, 우하하하 하는 정도의 감상만 남겼고, 솔직히 그 이후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게 적으면서 한번 들어온 것은 오래 잡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쏙 들어오지 않는 것들은 대부분 그렇게 잊혀진다. ‘국뽕’ 하고, 내가 이뤄낸 성과도 아닌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어깨 으쓱거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딱히 떠오르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그때부터 직관 갔어야 했는데, 흑. 삼산월드체육관 코드에 붙어서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자배구에 대한 애정은 아주 앙증맞다. 내 성격상 지금까지 사랑한 날보다 앞으로 사랑할 날이 더 길게 남았다. 앞으로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실제로 나는 요즘 25-26 V리그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동안 시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배구하는 시간을 보고, 그전까지 미친 듯이 하루 일과를 마친다.
최애 구단 홈경기를 한다? 그럼 직관을 가야지, 집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무조건 가야 한다. 예매 일정 뜨면 시간 맞춰서 자리 잡고, 스케줄 정리하고, 귀찮아 힘들어 하기 싫어 없이 해야 하는 일을 싹 끝낸다. 그런 다음 보자기 두르고 클래퍼 흔들면서 구단 홈으로 뛰어가야 한다.
홈 경기장 가는 내내 기분이 좋다. 멀리서 보이는 체육관과 구단 응원가를 들으면 흥겹고, 두근거리고, 우리 팀 벌써 우승인 것 같고...
집에서 볼 땐 주로 책상 앞에 앉아서 본다. 그때 꼭 필사하는데(필사도 벌써 십일 년이나 했다. 이 정도면 버릇이라고 해도 되겠다. 매일 안 하면 찜찜할 정도니까. 뭐든 한번 하면 놓지를 않는다...), 어느 순간 만년필 잉크가 말라가도록 뚜껑을 열어놓고 입 벌린 채 배구 중계만 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덕분에 잉크가 잘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노트엔 만년필 촉이 지나간 자리 위로 뚝뚝 끊어진 흔적만 잔뜩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좋을까? 항상 배구가 보고 싶다. 일하다가 힘들어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 배구 보고 싶어. 제발 365일 배구 해주면 안 될까? 하자. 그냥 해. 하자니까. 유소년 배구선수 지원하는 것부터 좌식배구까지 공중파 중계하는 걸로 법을 정하자. 매일 하자, 그냥. 근데 선수 몸도 생각해야 하니까 경기 없는 날 중계 재방송을 하루에 삼십 시간씩 하자.
이걸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배구에 관련된 소설로 메일링 서비스를 준비 중이지만, 내가 배구를 사랑하게 된 과정도 남겨보고 싶어서 처음 써보는 (나름대로)에세이를 천천히 이어가 보려고 한다.
이거 쓰다 보니 또 배구가 보고 싶다. 물론 나는 오늘 최애 구단 홈 경기 직관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