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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Mar 02. 2020

프리다 칼로 , 강하고 아름다운 보물

멕시코 혁명의 물결 속에서 프리다 칼로를 만나다

프리다 칼로 ( 1907~ 1954 ) / 멕시코

짙은 눈썹을 가진 그녀는 화난 듯 무표정했고, 말하기 힘든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한 듯한 모습 뒤에는 수 만 가지 감정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어 도저히 풀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힘겹게 다가왔다. 당당한 모습 뒤에 숨겨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이다. 그녀가 태어나고 3년 뒤엔 멕시코에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바퀴벌레, 즉 '라쿠카라차'로 은유되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폭압적인 정부에 저항했고, 농민들의 영웅 판초 비야(Pancho Villa)와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Salazar)가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암살이 난무했던 그 시절, 권력 위에 군림했던 자와 추앙받던 자 하나씩 사라져 갔고, 세상도 혼돈하며 빠르게 변화해갔다. 이것은 소녀 프리다 칼로가 바라본 세상이었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친구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던 프리다 칼로에겐 지식이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혁명이란 잔 다르크의 계시처럼 신성했고, 체 게바라의 투쟁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혁명만큼이나 사랑에 목말랐고, 사랑 또한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소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던 그녀가 싱그러웠던 18세에 일어났던 그 사고 이후 느꼈을 절망감은 철창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는 것만큼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문란한 사생활은 몸의 상처보다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때는 세상에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고, 불가능한 것은 없다며 당당했었는데, 자신의 한계가 보이고 세상에는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새하얗게 보였던 세상은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내 안의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도 프리다 칼로는 화살을 맞으면서 굳건히 서있고,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견뎌내자, 피하지 말자. 그녀는 삶의 고통에 대해 재정의를 내리는 것 같았다. 가끔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면   ‘이건 고통스러운 게 아니며’, ‘생각보다 아프지 않으며’, ‘별 일이 아니며’, ‘고통스러운 인생도 나쁜 게 아니며’, ‘그 인생조차도 의미 있고 아름답다’ 정도로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날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는 사건이 안 일어났다면 프리다 칼로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아마 똑똑한 의사로서 살아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머릿속에 프리다 칼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벽화를 그리고 있었던 남편 디에고에 대한 풋풋한 사랑의 기억은 그녀에게 더욱 강렬한 화가로서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어주었고, 남편이 관심을 가졌던 멕시코 문양은 그녀의 화풍에 반영되었고, 그녀가 태어난 이후의 멕시코의 혁명의 물결이 화가로서의 진출을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의 칸딘스키와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의 반열에 그녀를 두게 만든 것은 아닐까.  현재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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