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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Mar 05. 2020

알고 보면 달리 보이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프란시스코 고야는 왜 어두운 그림을 그렸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 고야 / 1819-1823


끔찍하고 잔인하다. 자신의 아들을 먹고 있는 그림이라니! 왜 이 엽기적인 그림이 유명해진 걸까? 이 그림에 관련된 신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기에 찬 눈으로 아들을 뜯어먹고 있는 사투르누스는 ‘씨를 뿌리는 자’의 의미를 가진 농경의 신이다. 사투르누스는 무지한 인간들에게 유용한 농업 기술을 가르치고 풍요로운 황금시대를 열어준 신이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는 감사한 존재이다. 이런 고마운 신이 왜 저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아들을 뜯어먹고 있나? 자신이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 때로부터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아들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야가 살던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해야 했다. 고야는 이 그림을 일흔이 넘어서 그렸다. 당시 고야는 마음의 병이 있었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시를 하거나 보여주려고 그린 것이 아니다. 스페인 시골 별장으로 내려와 자신이 거주하던 방의 두 면에 회반죽을 칠하고 그 위에 그린 그림이다. 당시 이렇게 탄생한 그림이 14점이 더 있었고, 이 그림은 그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칙칙해서 검은 그림(Black Paintings)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야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 고야는 스페인의 유명했던 화가인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를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왕립 미술학회에도 도전해보고 회화전도 참여하면서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결국 궁정화가로 된다.  카를로스 4세가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한 그 해, 프랑스혁명(1789년)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은 유럽 사회에 계몽주의의 물결이 흐르게 했다.  합리적 사유와 이성의 계몽은 사람들이 당연시 여겼던 체계 조차도 무너뜨렸다. 하지만 스페인 사회는 강력한 가톨릭의 영향 아래 놓여 있어서 그 변화를 더디게 진행되었다.


고야는 궁정화가로 일하면서도 계몽주의에 대한 영향을 받으며 신념을 키웠다. 마흔의 나이로 궁정화가로 출세를 하고 있었지만, 계몽주의 사상은 고야의 마음속에 있던 반골정신과 투쟁 심리를 자극했던 것 같다.


가톨릭을 공격하기 위해서 '변덕'이라는 의미를 가진 『로스 카프리초스』 판화집에서 스페인 사회와 권위적인 가톨릭을 공격했다. 종교재판을 두려워하여 결국 회수했고, 원판을 왕에게 기증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 금기시되었던 일반 여성의 외설적인 나체 그림 『옷 벗은 마하』 을 노골적으로 그렸다. 논란이 일자 옷을 입혀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또한 왕실의 화가로 일하면서 왕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왕 일가의 모습을 다소 무능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았던 고야는 프랑스혁명과 관련된 책을 탐독하면서 어쩌면 사상적, 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왕실과 특권계층을 조롱하며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808년 5월 3일 / 고야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념이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계몽주의의 깃발을 들고 프랑스의 이집트 민병대는 스페인을 침공한다. 스페인 시민들들은 프랑스 군에 의해 힘없이 죽어갔다. 프랑스에 의해 자행된 학살로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에 크게 분노했다. 고야는 당시 ‘아프란쎄사도(Afrancesado)'라 불리는 친프랑스 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 군이 철수하면서 고야의 입지는 좁아졌고, 말년에는 프랑스로 망명을 가야 했다.


고야는 자신의 눈을 뜨게 만들어준 계몽주의에 대해서 배신을 당했다.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의 물결을 몰고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가 자신의 고국인 스페인에 자행한 만행은 비합리를 넘어 극단적인 인간성 상실을 경험하게 했다. 참혹한 전쟁 이후에 고야는 자신이 믿었던 합리적 이성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사상도 절대적인 인 것은 없으며, 인간을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야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는 작품 ‘1808 년 5월 3일’은 고야에게 새겨진 친프랑스주의자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 만들어졌든 , 그렇지 않든 나에게는 고야의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진다.


처음에 소개했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는 바로 이런 고야의 심정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새로운 기술을 보급하며 풍요로움을 주었던 농경의 신이 어떻게 저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지. 계몽주의라는 탈을 쓰고 자행된 인간성 상실은 사투르누스와 닮아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자신이 믿었던 신념에 대한 배신이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귀는 멀어서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어둠 그 자체였다. 방의 벽면을 회반죽으로 입힌 뒤, 넘치는 그 감정을 붓을 들고 칠하면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칼날 같은 감정들을 소진시키며 버텨온 것은 아닐까.


다시보니 이 그림이 아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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