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이들을 특별한 주인공으로
허리춤에 옷이 찢어진 채 깨진 돌무더기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한쪽 무릎으로 지탱하고 있는 젊은 사내와 뙤약볕 아래서 모자를 눌러쓴 채 작은 망치로 돌을 타작하는 노파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돌과 건초뿐인 황량한 채석장에서 쨍쨍 돌 깨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급하게 허기진 배를 채웠는지, 한쪽 구석에 뚜껑이 살짝 열린 채로 치워져 있는 냄비와 그 아래 널브러져 있는 수프 스푼이 보인다. 말없이 각자 서로의 일을 하고 있다. 이들에겐 너무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 그림의 이름은 ‘돌 깨는 사람들’로 귀스타브 쿠르베에 의해 그려졌고, 원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드레스덴에서 폭격을 받아 소실되었다. 왜 이 그림이 특별한 걸까?
이 작품이 몰고 온 영향은 미술계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했다. 당시 꼬장꼬장한 미술계 원로들과 이들의 추종자들은 아카데믹한 기존 화풍이었던 낭만주의나 고전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림이라면 응당 특별한 것, 고귀한 것을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에서 이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은 기존 미술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파리 살롱전에서 당당히 이 그림을 출품한 사람은 바로 서른밖에 안된 귀스타브 쿠르베라는 청년이었다. 이 당돌한 남자의 등장에 비평가들은 혹독하게 비판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민들이 고작 돌을 깨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으니 말이다.
쿠르베는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보잘것없고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추켜 세웠고 , 이것은 당시 주류였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반발이자 아카데미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에서 그는 시골 장례식 장면을 묘사했다.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그림에 많은 인파가 운집해있다. 얼핏 보기에는 역사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동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인 주민들의 모습이다. 장례식장이라고는 하나 주민들은 장례의식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심지어 어수선하다. 누가 죽었는지,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이 그림은 주제와 교훈이 명확히 있어야 좋은 그림으로 평가받는 당시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이었다. 쿠르베는 기존 좋은 그림을 나누는 오래된 잣대에 해서 비판을 하며 자신의 예술적 철학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더 나아가 기존의 금기를 깨고 일반 여성의 적나라한 누드를 그렸고, '화가의 아틀리에'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우화적으로 그려 넣었다. 어떻게 이렇게 강한 멘털을 가질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의 생각을 견고하게 만든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가 걸어갔던 궤적을 따라가면 그의 생각을 조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지만, 시골에서 자랐고 나중에 다시 귀향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의 철학의 기초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당대 주류 사조들은 그의 눈에 뜯어고쳐야 할 구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반골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당대 기준으로 천박하고 노골적인 누드화를 그리고, 일개 평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만행을 저지르며 트러블메이커를 자처한 것은 아닐까? 만국박람회에서 출품한 14점 중에서 2점('오르낭의 매장', '화가의 아틀리에')이 심사위원에 의해 거부되자 열 받은 쿠르베는 그 앞에 당당히 개인전을 열 만큼 당돌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 스무 살 무렵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쿠르베는 당시 파리에서 영향력 있던 정치가 프루동의 사상에 감명을 받는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재산의 축적은 도둑질’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선언하였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에 가입을 해 당시 정치적인 활약을 했던 프루동과 연을 맺었다. 쿠르베는 아카니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뽑히는 명석하면서 실행력을 갖춘 프루동을 존경했고, 그 동경의 마음을 담아 프루동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현실을 반영하며 동시대성을 중시하는 쿠르베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쿠르베의 눈을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물게 했으리라.
프루동은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선언한 것처럼, 쿠르베는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사실주의는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이 스며있다.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예술이 바로 그가 말한 사실주의다. 천사의 모습을 그리라는 지시에 자신은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고 한 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이 이야기에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고상한 천사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말이었을 것이다.
늘 자신감 넘치는 그였지만, 그가 가입한 파리 코뮌이 실각하면서 나폴레옹 동상 철거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았고, 이후에는 복구 비용이 청구되어 파산이 될 지경이었다. 결국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스위스로 망명을 하고 나서 그의 그림에 대한 주제에 변화가 생겼다. 주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이 연상되어서인지 말년에 그가 그린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쓸쓸함이 느껴진다. ‘숭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힘차게 물살을 거스르며 자란 한 마리 숭어가 낚싯줄에 걸려 맥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시켰다. 뜨겁게 세상을 밝히다가 붉은빛을 발하며 애처롭게 산란하는 노을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화가와 혁명가의 사이에서 뜨겁게 살아간 이 남자의 이야기는 결말이 뭔가 허전하다. 그렇게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러기엔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기에는 그가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적어도 특별하지 않는 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국 시대를 살아가는 이 특별할 것 없는 민초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쿠르베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나도 그가 여전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