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시각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10시 전에 잠이 들었다. 산행으로 피곤했던 탓도 있었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빨리 잠이 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불을 끄고 놀 거리를 없애줘야 빨리 잠이 드는 것과 매한가지이구나. 지난밤 자려고 눕고 보니 꽤 쌀쌀해서 난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온도 조절 장치 위에 나그네의 노트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그네의 가이드대로 50도로 맞추어 두고 잠이 들었는데, 간밤에 난방을 하면 너무 뜨겁고 난방을 끄면 너무 추워서 밤새 난방을 껐다 켰다 했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나그네의 노트를 다시 보니 50도가 아니라 5도부터 시작하란 이야기였다. 아. 왠지 너무 뜨겁더라. 게다가 창문은 1/3쯤 열려 있었다. 그러니 등만 뜨겁고 춥지..
바보짓으로 지난밤 중간중간 깨긴 했지만 이미 아이 둘로 단련된 몸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개운한 아침이다. 방을 정리하고 이불을 개었다. 방 값이 너무 싼 것과 주인아저씨 다리가 불편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일을 덜어 드리고 싶었다. 세수를 하고 가방까지 모두 챙겨 건물 앞 나무 데크에 앉았다. 지리산이 훤히 보이는 멋진 뷰였다. 전날 카페 “안녕”의 주인이 뷰가 가장 좋은 숙소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주인아저씨께서 일어나셔서.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라고 말씀 주셨다. 배가 고프긴 한데 식사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방울토마토를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이 어제 부모님 댁에서 방울토마토를 따면서 “재미있어!”를 연발했다고 하던데, 괜히 아들놈 생각이 난다.
오늘도 할머니, 주인아저씨와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청국장을 끓여 주셨는데, 이 또한 맛이 훌륭했다. 어딘가에서 들깻가루 넣은 청국장을 맛보았는데, 맛있었니라면서 한번 시도해 보셨다고 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멋진 잔에 커피를 한잔 내주셨다. 이 커피를 실내에서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아침 시간을 보냈던 나무 데크에 나가 커피를 마셨다. 햇빛이 바로 얼굴로 내리쬐는데도 따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흘러가는 시간을 느껴 보았다.
잠시 뒤 집안에서 설거지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꽤 훌륭한 노래 솜씨이다.
주인아저씨 : “혹시 아침 8시 30분에 노래방 가보신 적 있으세요?"
나 : “아니요. 오전에 여는 노래방도 잘 없는 것 같은데요?"
주인아저씨 : “노래방 하실래요?"
나 : “아.. 네!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합니다."
먹던 커피를 챙겨서 집으로 들어가니 이미 임재범의 “비상”의 반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허. 아침부터 노래방이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아저씨는 그냥 부르고 싶을 때 노래를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슨 노래를 부를까 하다가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생각이 났는데, 그 노래가 마침 노래방 반주기에 없어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골랐다. 오.. 내 노래 취향이란. 아침이라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전주에 켁켁켁 세 번을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래도 키를 낮춰 부르니 그럭저럭 부를 만했다. 문도 열어둔 채로 아침부터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나니, 왠지 웃음이 슬며시 났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지리산의 새들아 내 노래 잘 들었니? 내가 대학교 때 학점과 바꾼 노래란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노래를 5곡 더 부르고 나서야 아침 노래방은 문을 닫았다. 노래를 트고 났더니 아저씨와 이야기 나누기가 훨씬 편해졌다. 아침부터 이상한 짓을 함께한 동료의식 같은 걸까.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캠핑카를 하나 사서 여유가 되실 때 캠핑카를 타고 다니시며 커피를 파신다고 했다. 올해도 곧 떠나실 것이라 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일까 절대적인 것일까?”, "행복이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인가, 현재에 느끼는 것인가, 미래에 기대하는 것인가?”
(할머니를 옆에 두고) 할머니가 돈을 너무 아끼고 못 쓰신다는 앞담화를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께서 가는 길에 천막(갑빠라고 부르셨다)을 좀 정리해 달라고 하셔서 도와드렸다. 할머니는 말없이 곶감 4개를 건네셨다. 여행 와서는 항상 드리는 것보다 많은 것을 받게 된다.
오늘은 4코스를 가야 한다. 4코스 시작점으로 가니, 안내센터가 문을 닫았다. 어제 들고 다녔던 지도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다. 하지만 어제 표지판을 보고 길을 잘 찾아갔으니 그냥 한번 가보기로 했다. 길을 가다 보니, 다시금 오늘 아침 노래방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면 노래를 녹음 해 둘 것을 그랬다. 이 생각이 들자 여운이 가시기 전에 노래를 하나 녹음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걸어가면서 아침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녹음해 봤다. 내 목소리와 함께 새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다 들어갔다. 이건 비긴 어게인인 거다. (여기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곧 마을길이 끝나고 숲길이 나타났다. 어제 보다 숲길에 돌이 많다. 아무래도 동강 옆을 따라가는 코스이다 보니 물이 흐르는 곳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돌이 쌓여 있는 것 같다. 돌이 많으니 바닥이 단단한 등산화 생각이 난다. 역시 사람이 준비하는 만큼 편해지는 거다. 숲길은 계속 이어지고, 표지판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다. 대낮이고, 핸드폰도 잘 터지고 물소리도 들려 오지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괜히 불안해진다. 그때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웬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나 했는데, 어느새 고양이가 내려와서 내 길을 막고 다리에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흠. 이거 뭔가 산신령이 내게 고양이를 보내셔서 이 길이 아닌 것을 알려 주시려는 걸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올라오신 아저씨가 고양이를 보더니 빵 하나를 옛다 하고 던져주셨다. 고양이는 냉큼 빵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아.. 그렇지.
아저씨는 동강 쪽을 향해 가시다가 너무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다시 금계 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여하튼 나 말고도 이 길을 간 사람이 또 있으니 틀린 길은 아닌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숲길은 끝나고 아스팔트 길을 잠깐 지나 강 옆길로 접어들었다.
시원하게 흐르는 동강 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계곡에 놀러 가던 기억이 떠 오른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까지 기여코 가서 텐트를 치던 아버지가 참 고생을 하셨겠구나 싶다. 잠깐 강에 내려가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시원한 그 기분에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다. 월요일이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4코스이다 보니,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 풀이 우거져서, 팔로 헤치고 가야 하는 곳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 길들을 지나 마을로 다시 들어섰다. 1시가 넘어서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때였다. 어제 먹지 못했던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한번 먹어보자 생각하고 마을의 첫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 : “뭐 필요하노?"
나 : “해물파전이랑 막걸리 주세요."
할머니: “정구지 써리가 지금 부치야 돼서 시간 좀 걸린다. 괘얂나?"
나 : “네. 괜찮습니다. 천천히 주세요."
할머니: “근데 돼지고기 해놓은 거 있는데 혹시 그거 물래?"
나: “네. 흐흐. 그걸로 주세요."
할머니께서 상을 내오시는 동안 평상에 잠깐 누웠다. 어제의 피로가 남아 있는지 허리가 조금 뻐근하다. 여하튼 배낭을 내려놓으니 좋구나. 곧 할머니가 상을 봐오셨다. 허허, 혼자 해물파전 하나를 다 먹으면 좀 질리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예 상을 봐오셨구나. 오히려 잘 되었다. 막걸리를 한잔 따라 마셨다.
할머니는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앉으셔서 빨갛게 마른 고추 꼭지를 떼어 가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동네에서 선거 자금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법원에 다녀온 이야기, 암에 걸려서 서울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 서울에서 강사를 하는 아들과 그가 데려온 여자 친구 이야기 등등.. 막걸리를 마시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맞장구도 쳐 드리고 내 이야기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할머니께 건강하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물 한 병을 받아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막걸리 한 병을 혼자 마셨더니 취기가 살짝 오른다. 생각이 흐려지고 발걸음도 따라서 휘적휘적 느려진다. 다행히 이제 돌길은 더 이상 없고, 평탄한 아스팔트 길이라 취객이 걸어가기에 나쁘지 않다. 적당한 타이밍에 막걸리를 마셨구나 싶다.
다시 걸어가다 표지판을 보니 이제 4코스도 거의 끝나간다. 이제 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진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겠지. 아쉬운 마음에 뒤를 한번 돌아본다.
지리산에 온 지 이제 한 30시간 남짓 되었나? 훨씬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소소한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시간들이라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다음 버스는 1시간 30분 뒤에 온다고 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싶다. 서울에서 버스 정류장 안내판에 다음 버스가 13분 뒤에 온다고 했을 때 느꼈던 불편한 마음이 이곳에서는 1시간 30분라는 시간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와이프가 둘째를 안고 보낸 메일을 읽었다. 나의 선택을 믿고, 우리의 미래를 기대한다고 한다.
그래 이제 서울로 돌아가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