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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성 Oct 21. 2016

지리산 둘레길 여행 - 첫째날

회사와 회사사이

오늘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7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면서 어딘가로라도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둘째 100일 잔치가 끝나자마자 첫째를 데리고 진주로 내려왔다. 첫째를 부모님께 맡겨 두고 혼자 가는 여행이다. 혼자 가는 여행이 엔써즈에 입사하기 전 일본에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무려 7년 만이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오늘 아침까지도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목적지만 있었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아버지께서 던져 주신 “산청 지리산 둘레길 지도”를 받고 서야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수집해 두는 아버지의 습관이 이럴 때 빛을 발하는구나)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것은 너무 알아볼 것이 많을 것 같아 “지리산 둘레길 주차”로 검색을 했다. 3코스 출발지인 일월 안내센터 앞에 무료로 주차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등산복은 아버지 것을 빌렸다. 어머니께서는 먹을 것과 수건을 가방에 챙겨 넣어 주신다. 엔써즈에서 가져온 노트북 가방이 등산가방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차를 타고 출발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지리산이 위치하다 보니 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1시간 정도 걸려 일월 안내센터에 도착했다. 안내센터에 들어가니 지도와 함께 코스, 그리고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오는 방법 등을 자세하게 안내해 주셨다. 배낭을 고쳐 메고 출발했지만 5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시작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구나. 나는 길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끔 정신을 놓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길을 나서자마자 20대 후반의 약간 모자라 보이는 여자분이 같이 걷기 시작한다. 같이 걸으면서 동네 교통사고 난 이야기, 옆집 이야기, 집에 총과 수갑이 있다는 이야기(응?), 할머니 돌아가신 이야기, 삼촌이 소나타를 산 이야기, 엄마가 나쁜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한 이야기 등등을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서울에서 길을 가는 중에 이런 사람을 만났으면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겠지만 혼자 가는 길이라 그런 이야기도 즐겁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았더니 “의자” 까지 간다고 한다. “의자”에 뭐하러 가냐고 물었더니 운동을 하러 간다고 한다. 한 10분 정도를 함께 걸어갔더니 벤치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앉더니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무엇이 고마운지는 모르겠다. 혹시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목에 걸린 핸드폰으로 엄마와 통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옆을 돌아 보니

길을 다시 가다 보니 어쩌다 50대 아저씨 그룹의 가운데에서 걷게 되었다. 아마도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하시는 것 같았다. 조금은 실없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누구야, 인생에 내리막이 좋냐? 오르막이 좋냐?"
“평지가 제일 좋지. 하지만 사람들이 평지를 계속 걸을 수 없고, 내리막을 걷게 되니, 오르막이 다시 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오르막, 내리막 이야기를 하는 거지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좁은 길이 연속되어 아저씨들 사이에서 계속 걸었어야 했는데, 다행히 아저씨들은 쉼터의 막걸리 파전 콤보를 이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둘째의 백일떡을 꺼내 먹기 시작한다. 어딘가에 들러 막걸리와 함께 떡을 같이 먹을까 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조금만 더 가서, 조금만 더 가서 라고 말하게 된다.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라 빨리 갈 필요도 없는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처럼 급한 마음이 계속된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급할 필요가 있나 싶어 일부러 걸음을 늦춰 본다. 하지만 늦게 걷는 걸음에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하다. 서울 사람이 되었나 보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늘에 앉아서 막걸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던 분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재: “혼자 왔습니까? 금계까지 갑니까?"
나: “네. 혼자 와서 오늘 금계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아재: “그럼 여기 와서 막걸리와 밥 좀 먹고 가이소."

옆에 털썩 앉아서 먹던 컵과 먹던 젓가락을 건네받았다. 막걸리와 오징어무침이 아주 잘 어울린다.

아재: “오데소 왔소?"
나: “아. 서울에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잠깐 시간이 비어서 내려왔습니다."
아재: “와, 서울 회사도 그만두는 사람이 있네. 여기 좋십니까?"
나: “네. 공기도 너무 좋고, 눈에 보이는 곳에 사람과 건물이 하나도 없는 것도 너무 오랜만입니다.”

혼자 와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 목적지에서 만나게 되면 파전이라도 하나 사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여기 저기 가득히 달린 감나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게 던지던 질문들은 바뀌지 않았고, 답을 찾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다. 여행을 와서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것은 욕심이었던 것 같다. 이럴 바에는 아예 생각을 비워보자라고 생각하지만 질문들은 금방 머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이 나온다. 몸이 힘드니 생각이 없어진다. 


출발할 때 안내센터에서 8시간 코스라고 말씀을 주셨었는데, 가장 높은 등구재에 쉬면서 계산해보니 이 페이스면 6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다. 빨리 내려간다고 해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감농원 앞에 놓인 평상 위에 가방을 던져두고 하늘을 바라보며 털썩 누웠다. 그러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냥 맑은 하늘인 줄 알았더니, 구름이 있다. 그냥 숲인 줄 알았는데 이름 모를 다양한 나무들이 섞여 있다. 걸을 때에는 눈 앞의 나무뿌리, 돌멩이들만 보았는데 멀리 겹쳐져 있는 산들이 보인다. 뭔가 미술시간에 색깔로 원근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표현하면 될 것 같다. 안 들리던 것들도 들려온다.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들리고,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아마 다람쥐가 지나가는 소리인가 보다. 지금의 나도 인생으로 보면 잠깐 멈추어 섰을 때인데, 달릴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해 본다.

산들의 색깔을 잘 보자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감 농장 앞에 놓인 무인 “아이스 홍시” 판매대가 보인다. 상자에 천 원을 넣고, 아이스 홍시를 비닐에 하나 담았다. 무인 판매대이니 홍시의 손실률이 얼마나 될까? 어떤 가격이 최적일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털레털레 봉지를 들고 내려오다 보니 살짝 녹았는지 껍질이 잘 벗겨진다. 이거 완전히 꿀맛이다. 두 개를 담아 올 것을 그랬다.

월드콘보다 훨씬 싸다

조금 더 내려오다 보니 “안녕”이라는 마을 카페가 보인다. 기대 이상으로 깔끔한 카페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천을 받아 오미자차를 한잔 시켰다.

열매가 같이 얼려져 있는 얼음이 예쁩니다

옆 테이블에는 9살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엄마가 둘레길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젊은 카페 여주인은 도시녀인 자신이 이곳에서 카페를 하게 된 스토리를 들려준다. 이곳 둘레길이 마음에 들어서 일 년에 몇 번씩 내려와서 단골 민박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결국 그 단골 민박집 아들과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소소하지만 서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들고 갈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노트북을 카페까지 왔으니 안 꺼내 놓을 수가 없다. 맥북을 꺼내 놓으니, 

카페 여주인  : “헉. 노트북을 가져오셨네요?"
나 : “아. 제가 개발자이다 보니 노트북이 없으면 불안하네요."
카페 남주인 : “저건 노트북이 아니라 맥북이야. 나도 저거 사줘"

역시 맥북은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카페에 있는 오랜 노트북을 아이패드 같은 것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개발자인 내게 중고 가격을 물어보셨다. 어찌어찌 이야기가 되다 보니 우리 집에 있는 구형 아이패드를 중고로 팔기로 하고 명함을 받아왔습니다. (역시 비즈니스 기회는 어디서 생길지 모릅니다.)

카페의 좋은 점이 모두 있는 카페. 조용하고, 차가 맛있고, 주인분이 친절하고,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다.

카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오래 앉아 있었는데, 해가 지기 전에 금계를 향해 발을 옮겨야 했다. 카페 사장님께 “나마스떼”라는 민박집을 추천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도 디스카운트는 없겠지만, 나중에 카페 사장님네 포도를 한 박스 팔아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값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길에 쿠키도 하나 얻었다. 


산에 밤이 빨리 내린다고 하더니, 내려오는 길이 벌써 어둑어둑 해진다. 이 길이 3코스에서 가장 예쁜 길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경치 구경은 그만하고 어서 내려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다. 금계로 내려와 추천받은 “나마스떼” 민박집을 찾았다. 거실에 누워서 복면 가왕을 노모와 함께 보고 계시던 주인분이 내가 방을 찾자 청소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당황 해 하셨다. 방을 확인해보니 충분히 깨끗해서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3만 원이라고 말씀 주셨다. (방안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니 4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 “혹시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주인: “아. 요 밑에 내려가시면 XX 식육식당이 있습니다. 그래도 동네에서는 그 집이 제일 유명해요."
나: (귀찮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자)
주인: “저희가 그냥 밑반찬이랑 밥을 먹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드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준비하는 거니 정말 별거 없습니다."
나: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이렇게 오늘 점심, 저녁을 모두 얻어먹게 되었다. (내게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방에 들어와서 짐을 풀었습니다. 독채 방이고, 따뜻한 물도 콸콸 나오고 무려 WiFi 도 되는데 3만 원이라니, 내가 너무 서울 물가에 익숙해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여하튼 다시 방으로 가서 식사 준비를 살짝 도와드리고 같이 복면 가왕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된장국에 딱 입에 맞아서 밥과 국을 더 떠서 먹었다.


방에 들어오니 7시가 되었다. 밤이 되었는데 가로등이 없어서 어디 집 밖으로도 못 나갈 것 같고, 여기까지 와서 TV를 보고 싶지도 않아서 방에 들어와서 CD 플레이어로 타이타닉 주제가를 들으면서 카페에서 쓰던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첫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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