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이야기

#1 파리(PARIS)

by 카오스 혜영

여행을 많이 사랑하면서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청춘을 보낸 나는 40대 중반을 넘어섰을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처음 할 수 있었으며, 기껏해야 4~5일의 휴가가 고작인 직장인의 신분으로 한 번에 한두 개의 도시를 다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나의 여행에는 스스로가 정한 원칙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도시의 랜드마크나 소문난 맛집에 연연하지 말 것이며, 두 번째는 가급적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도시의 일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든 여행길이 막혀버린 지금 그동안 다녔던 몇 안 되는 도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퉁퉁부은 다리와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부여잡고 다녔던 그 도시들을 소환하여 추억함으로, 답답하고 암울한 이 시기에 자그마한 선물처럼 나 자신을 위로하고자 함이다. 내가 밟았던 첫 유럽의 땅, 파리에서 도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리옹역에 내려 처음으로 유럽식 석조 건물을 보았을 때,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들어와 센 강과 에펠탑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헉! 내가 정말 파리에 와 있구나 실감하며 감동의 물결이 몰려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생애 첫 유럽 여행지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파리는 걷기 여행에 최적화된 도시이다. 어머니 대지의 축복 속에 유럽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에 자리 잡은 프랑스의 수도답게 이 도시는 대부분이 평지인 데다(가장 높다는 몽마르트르 언덕도 해발 130m에 불과하다) 사통팔달로 뻗어 있는 방사형 도로는 길 찾기에도 용이하며 도심의 규모도 적당히 아담하기 때문이다. 루브르에서 튈르리 공원,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파리의 화려함에 취해도 좋고, 센 강을 따라 파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천천히 걷다 아름다운 다리 위에 연인들을 보며 미소 지어보는 것도 괜찮다. 걷다 지치면 뤽상부르 공원 한편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아 쉬어도 되고 젊음이 넘치는 생 미셀 지구의 아무 노천카페에서나 에스프레소 한잔 먹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바스티유 광장에라도 들어선다면 비록 타민족의 조상일지라도 이 도시의 자유를 위해 뿌려진 그 옛날 혁명 전사들의 고귀한 피 흘림을 추모하며 잠시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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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송의 도시, 패션의 도시, 낭만의 도시, 예술의 도시 등등 파리에는 많은 아름다운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나에게 파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나는 “무심함의 도시”라 이름할 것이다.

센 강은 파리 시내 한복판을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으며 강변에서 또 아름다운 다리 위에서도 사람들은 무심하게 산책하고 연인들은 키스한다. 시테섬 한복판에는 어디선가 콰지모도가 튀어나올 것 같은 노트르담이 천년이 넘는 시간을 이고 무심하게 서있으며 루브르의 회랑에도 무심한 듯 걸려있는 모나리자와 비너스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메트로(파리의 지하철 이름)를 타는 사람도, 메트로의 수동 손잡이(파리의 지하철은 자동문이 아니다. 걸쇠 같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수동문이라 내리고 싶으면 지하철이 정차했을 때 철커덕! 하고 열어야 내릴 수 있다. 처음 보았을 때 가히 문화충격이었다)를 여닫는 손길도, 메트로를 나서자마자 담뱃불부터 붙이는 남녀노소들도 그들이 버린 담배꽁초를 쓸어 담는 거리의 환경미화원도 모두 다 그럴 수 없이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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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런 무심함을 깨버리는 소소한 일들을 겪기도 하는데 공원에서 먹던 빵을 훔쳐가고 도네이션을 핑계로 접근하는 집시 여인들을 만난다거나 과도한 친절을 베풀며 사진 한방 찍어주고는 몇 유로를 요구하는 엉뚱한 피에로 아저씨를 만난다거나 할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렇다고 무심함을 깨는 것이 이런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 제르망 데 프레 거리에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 음식이 너무나 맛있고 서빙하는 웨이터 할아버지가 더없이 친절한 미소를 보내줄 때, 메트로에서 커다란 여행 캐리어를 들고 출구를 못 찾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나서 엘리베이터 위치를 알려주는 초록눈을 한 여인을 만났을 때 파리의 무심함은 기분 좋게 깨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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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시에는 냄새가 있다. 어떤 도시의 냄새는 느낄 순 있어도 표현할 순 없지만 파리의 냄새는 표현할 수 있다. 찌린내다. 파리에서는 분명히 찌린내가 난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찌린내는 결코 좋은 느낌의 냄새는 아니다. 하지만 찌린내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고 다시 찾아오게 하는 무엇인가가 이 도시에는 분명 있으며, 그 무엇인가는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이다. 나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친 여행객의 몰골로 들어갔던 전혀 유명하지 않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Have a nice holiday!!라고 인사해주던 잘생긴 웨이터 청년은 아직도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지, 에펠탑 아래 포장마차에서 팔던 아주 맛있던 파니니는 지금도 가면 먹을 수 있는지, 판테온 앞에서 1유로를 구걸하던 거지 청년은 지금 취업해서 잘살고 있는지, 어느 식당에서 내 옆에서 굴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던 기품 있는 노부인은 아직도 굴요리를 좋아하시는지... 이 모든 것들이 궁금해서이다. 그래서 나는 찌린내 나고 무심한 이 도시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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