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에 담긴 물을 쏟았다.
손이 미끄러워서 미처 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한 번쯤은 누구라도 미끄러지는 순간이 있을 테지.
그렇게 믿어버리면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을 수 있겠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가수 이상은, 언젠가는)
오래전부터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곡인데 마침 친구가 듣고 있길래 노래를 틀었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고 우리는 또 헷갈려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색이 바랜 가을 잎새처럼 농후한 세월이 지나간다.
어느 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을 먹고서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 ”오늘은 재킷을 걸쳐야 하나“ 하다가 창문을 열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 거리를 바라본다. 옛일을 어렴풋이 기억해 내면 보고 싶은 얼굴 떠올리며,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까.
가끔은 어제일 조차 희미하다.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보다 나았으면 생각하다가 물을 쏟았다.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바닥을 닦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떤 날엔 흐리지 않아도 비소식을 예상한다. 감정이 날씨를 잡아먹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간혹 이유가 없는 오보를 내지만 가을이라서 가능한 일. 지난 저녁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고 반가운 연락도 많았다.
나는 한동안 잘 지내지 못할 것 같다. 다정한 인사뒤에는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바람은 서늘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가을의 문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