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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호 Feb 16. 2024

왜 학력고사 시절에는 의대 선호현상이 없었을까?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유

날이 갈수록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과 최상위권은 전국 의대를 모두 채운 후에 다른 과들을 간다고 할 정도인데요.  그렇다 보니, 의대 쏠림 현상이 별로 없었던 30년 전 입시 배치표가 다시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왜 30년 전, 40년 전에는 의대보다 공대를 선호했을까? 의아해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지난 30년간 의사들만 좋아지고 다른 직종은 대우가 나빠져서 그런 게 아니냐는 얘기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대의 인기가 높아진 이유로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지적합니다.


1. 의사와 직장인의 큰 소득 격차

2. IMF 이후로 직장인들의 직업 안정성이 떨어짐

3. 엔지니어에 대한 대우가 나빠짐


대체로 맞는 말이고, 특히 의대 선호현상이 IMF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는 점을 보면, 직장에 대한 직업 안정성이 떨어진 것이 분명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대학생들의 취업률도 높았고, 또 기업들이 대량해고를 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한번 취업하면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살았기에, 굳이 의대를 가지 않아도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IMF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살아남은 기업들도 구조조정으로 대량해고를 하면서, "취업=평생직장"이라는 공식이 깨졌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더구나 이직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의 고용구조상, 전문직이나 공무원이 아니면 조기퇴직 등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2000년대부터는 전문직과 공무원 선호현상이 신드롬 수준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에 의대 선호현상이 적었던 이유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력고사 시절에 의대에 원서를 쓰려면 담임과 싸워야 했다는 점입니다!


왜 싸우냐?  그런 일이 진짜 가능하냐?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저는 학력고사 시절에 입시를 치렀기에 그때 분위기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우선 학력고사 시절에는 여러 대학을 동시에 지원할 수 없었고, 1개 대학을 정해서, 1개 학과를 1지망으로 지원하고, 같은 대학의 또 다른 학과를 2지망으로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지망에서 90% 이상 뽑거나 100% 다 뽑는 경우가 많기에, 2지망은 그냥 혹시나 하는 식으로 지원을 하고, 일반적으로 1지망 학과보다 입결이 낮은 과를 2지망으로 씁니다.


그런데, 입시 원서를 쓰기 위해서는 담임 선생님의 도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와 연고대에 몇 명을 보냈는가가 담임 선생님의 실적으로 들어가기에, 담임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서울대와 연고대에 더 많은 원서를 쓰도록 유도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학교마다 서울대를 몇 명 보냈나, 연고대를 몇 명 보냈나가 언론에 순위로 나왔는데, 학교마다 이 순위를 높이고 싶어서, 어떻게든 서울대와 연고대에 많은 학생들을 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느 학과를 합격시켰는가는 전혀 언론에도 통계를 잡지 않았고, 학교 순위에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서울대 의대에 1명을 합격하건, 서울대 농대에 1명을 합격하건, 학교 입장에서는 똑같은 입시 실적을 낸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서울대나 연고대의 낮은 학과에 합격이 가능한 학생이 다른 학교의 의대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담임 선생님이 원서를 써주지 않았습니다.


원서를 쓰기 위해서는, 학부모를 학교로 데려오고, 학부모가 담임 선생님에게, "당신이 내 자식의 인생을 책임질 거냐?"라는 식으로 따지면서 교무실에서 고성이 오가며 실랑이를 벌여야, 그제야 마지못해 담임 선생님이 원서에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엔 그게 당연했습니다.  학부모가 자녀 입시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담임 선생님에게 따질 용기가 없었다면, 그냥 담임 선생님이 추천하는 학교와 학과로 바꿔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에도 서울대가 아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의대, 치대, 한의대가 그 대학에서 최고의 입결이었지만, 그렇다고 지방대 의대가 연고대의 다른 학과보다 높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학과보다는 학교 간판이 훨씬 선호되는 시절이었고, 그게 강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지방대 의대가 명문 대학의 일반학과보다 입결이 낮은 건 설명이 되지만, 서울대 의대보다 서울대 물리학과나 다른 공대가 높은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당시 서울대의 경우 유난히 물리학과나 공대의 인기가 높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서울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들은 당시에도 대부분 의대가 같은 대학의 다른 학과들보다 인기가 더 높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물리학과나 공대의 인기도는 어찌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과장된 느낌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배치표를 보면 서울대 의대가 물리학과나 공대보다 크게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금 관점에서는 물리학과나 공대가 의대와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실이지만요.


또 당시엔 서울대 물리학과와 인기 공대는 학과 정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선지원 후시험 시절에는, 시험 결과에 따라 입결 순위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도 많아서, 딱히 어느 학과가 어느 학과보다 입결이 더 높다라고 단정하기 힘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 학과에 지원한 학생들이 특정 해에 학력고사 시험을 유난히 잘 치르면, 그 학과의 입결이 예상보다 높아질 수 있었는데, 학과 정원의 숫자가 적을수록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쉬웠습니다.


참고로, 선지원 후시험 제도는 1988년에서 1993년까지 6년 간만 시행되고 폐지된 제도인데, 입시생들이 시험을 치르기 전에 지원부터 해야 했기에,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합격생들 사이에서도 점수 차이가 많았습니다.  학력고사에서 대박이 나도, 애초에 하향지원을 했다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없었기에, 수석 입학을 하면 오히려 억울한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또, 최상위권 학생들은 최상위권 학생들끼리 경쟁해서 1점이라도 떨어지면 재수를 해야 했기에, 재수생들 숫자가 폭증하고, 종로학원 대성학원 같은 소위 유명 재수 학원은 입결이 연고대보다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여러 불합리한 점들로 인해 이 제도는 6년 만에 학력고사와 함께 폐지되고,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바뀝니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똑똑하면 어느 학과를 가도 대우를 받는다는 인식이 강해서, 상위 1% 학생들의 의대 선호가 낮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엔 의사들의 실제 수입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의사와 직장인들의 수입차를 일반인들이 잘 몰랐던 이유도 있습니다.


실제로 80년대야 말로, 의사, 한의사들의 천국이었는데, 당시엔 높은 수입에도 세금이 낮아서, 의사, 한의사들은 개업 5년 만에 빌딩을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때는 금융실명제도 없고, 크레딧 카드도 보급화되지 않아서, 개인 사업자들이 모든 수입을 세금신고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이러한 전문직이나 개인 사업자들의 수입 통계가 실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또 인터넷도 없고, 모든 정보는 신문과 TV에만 의존해야 하다 보니, 굳이 사회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성하는 수입 비교 같은 것은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았고, 다뤘다고 해도 신고한 소득에 따른 통계로만 비교했으니, 일반 사람들은 의사들이 얼마나 많이 버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의사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열쇠 3개 (자동차, 집, 병원)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의사 직종의 인기는 높았지만, 그냥 막연히 좀 많이 벌겠지 정도였지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옛날에 의대 선호 현상이 낮았던 이유는, 대학 간판을 유난히 선호했던 당시 분위기와 학교의 강요, 그리고 의사들의 소득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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