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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호 Mar 09. 2024

드래곤볼이 한국 문화에 끼친 영향

지난 3월 1일에 ‘드래곤볼’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가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딱히 이 작가의 광팬은 아니지만,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슬픔보다는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세대에 엄청 큰 영향을 준 아이콘이 또 하나 사라졌다는 생각에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본 만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일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고, 전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훌륭한 작가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기뿐 아니라,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를 논할 때, 일본 만화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90년대 말에 일본 문화가 전면개방되기 전까지는 일본 문화 자체가 불법이어서, 일본 영화나 노래 등은 20세기에는 공식적인 루트로 접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좀 특별했습니다.  영화나 노래에 비해 아동용이 많고 왜색이 덜한 작품이 많다는 특성상, 70년대 초부터 이미 공중파에서 제작국을 숨기고 일본 만화영화들을 더빙해 방영하였고, '어문각' 같은 당시 메이저 출판사에서는 '바벨 2세', '베르사유의 장미' 같은 일본 만화를 한국명의 가명작가를 내세워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80년 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하는 버블 시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장르도 매우 다양해집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문화 정책에서 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신군부인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펴면서, 정치성이 없는 작품에 대해서는 유신 정권 때보다 검열을 완화했고, 또 불온서적이 아닌 이상 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해적판 출판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이로 인해, 80년대에는 수많은 일본의 인기 만화들이 조악한 번역 품질의 해적판으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0대 아이들은 손쉽게 '닥터 슬럼프', '세인트 세이야', '시티 헌터', '공작왕', '북두의 권', '오렌지 로드', '쿵후보이 친미' 등의 일본 만화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화의 작가는 여전히 한국명의 가명으로 출판되어서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 사실이 아이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일본 만화 중에서도 단연 인기 1위는 '드래곤볼'이었습니다.  드래곤볼은 일본 만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고 해적판 만화를 사보지 않는 아이들까지도 알 정도로, 80년대 후반 우리나라 10대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 자체가 워낙 재미있기도 했고, (어쨌거나 시작은) '서유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보니 왜색도 없고 다른 일본만화보다 거부감도 적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우리나라에서 해적판 드래곤볼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정도가 가늠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초대형 시장을 메이저 출판사들이 아닌 듣보 해적판 출판사들이 싹쓸이하는 상황이었으니, 당시 메이저 출판사들은 속이 탔습니다.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 '보물섬' 등의 한국 만화로만 채워진 소년 만화 잡지들의 인기는 해적판 일본 만화에 밀려 서서히 시들어져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아이들도 점점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의 수준차이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메이저 출판사 중 하나인 '서울문화사'에서 1989년 '아이큐 점프'라는 새로운 만화 잡지를 창간하면서, 창간과 동시에 드래곤볼을 정식 라이선스로 발매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문화 역사에서 하나의 큰 이정표였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본 작가의 이름이 정확히 박힌 제목의 만화가 발매를 한 것이었습니다.  '김동명', '전성기', '성운아', '구호' 같은 가명의 한국 작가가 아니라,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일본 작가 이름이 한국의 아이들에게 각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90년대에는 '슬램덩크' 등 수많은 일본 만화들이 정식 라이선스로 발매되었고, 해적판 시장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한국 만화가들도 예전처럼 일본 만화를 대충 베껴서 히트 치는 것이 더 이상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 신선하고 정성 들인 만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당시 일본 만화 수준의 잣대로 한국 만화까지 평가하게 되면서, 만화가 대충 그려도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벌 수 있는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게 됩니다.  한국 만화계엔 아주 큰 경종이 된 셈입니다.




요즘 K-Pop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인기 있는 K-Pop 아이돌 그룹은 많습니다만, 그중의 최고 인기는 단연 'BTS'입니다.  인기만 많은 것이 아니라, BTS가 없었다면 지금의 전 세계적인 K-Pop의 열풍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만화의 BTS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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