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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호 Oct 27. 2023

스마트폰 중독

異현호

문득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이하윤(異河潤)의 ‘메모광(狂)’이라는 수필이 생각이 나서, 패러디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스마트폰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스마트폰을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스마트폰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스마트폰으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노트북도 태블릿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스마트폰이거나 ―아이폰이어도 좋고, 안드로이드도 가릴 바 아니다.― 닥치는 대로 게임을 하고, 종횡(縱橫)으로 화면을 전환하여 사용하다 보니, 보호케이스가 일변 닳고 해지고 마는지라, 만일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겸용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고장이 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게임 전략, 혼자 있는 날에 보고 싶은 야동의 품번,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의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스마트폰과 충전기가 상비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스마트폰으로 검색할 수가 있다. 


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의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검색할 때까지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수효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망상의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스마트폰이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스마트폰 중독자에게 있어서 부자유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넘어서는 동안, 고개 안팎에서 얻은 실로 좋고 아름다운 상(想)을, 나는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에 곧 의뢰하건만 ― 바쁜 행보 중(行步中), 혹은 약간의 취중에 찍은 동영상이나 사진은 뭘 찍었는지 그 개념(槪念)이 불충분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런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모색하는 고통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 마치, 예의 있는 석상에서 상대방의 불쾌를 우려하여, 기자풍(記者風)의 괴벽(怪癖)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통과 비견(比肩)할 만도 하다. 그래, 그 분명하지 못한 자신의 셀카를 응시 숙려(凝視熟慮)해 보건만, 결국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적지 아니하다. 연상(聯想)의 두절(杜絶)로 인한 무의미한 파일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산란하게 해 주었을 따름이요, 그렇다고, 별반 큰 변동이 나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침마다 나는 그 스마트폰을 대략 살펴, 그날의 스케줄을 발췌 초록(拔萃抄綠)해 들고 집을 나서건만, 물론 실행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기회 있는 대로 검색하고 찍어대는 셀카, 여기저기 기이한 흔적을 보여 주는 몇 장의 인증 사진일지라도 나는 그냥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간수한다. 그것은 고액(高額)의 지폐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삭제한 일이 없었다. 


  사진뿐이 아니요, 평소에 별로 소유물을 잃어버려 본 일이 없는지라, 영수증이라도 이유 없이 어디다 놓고 온 때에는, 불쾌한 마음이 한 동안 계속되는 괴벽임에도 불구하고, 일대 사건 ― 내게 있어서는 실로 중대한 사건 ― 이 발생한 일이 있다.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나의 학창 시절에 자취하는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변기  위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려고 포켓을 뒤졌으나, 내 노력은 헛것이었다. 이 날 밤, 잠들기 전의 일과는 상궤(常軌)를 벗어나, 내 마음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찾고 또 찾고, 생각다 못해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나 가서도 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친구의 집을 그 길로 다시 되짚어 찾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쓰레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변소로 가는 마루에서 내 귀중한 스마트폰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란! 아직도 어렸을 적이라, 환호작약(歡呼雀躍)하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고 가라는 권유도 한 귀로 흘리고, 단걸음에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그날 밤은 평소에 드문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스마트폰 중독은 나의 정리벽(整理癖)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만화(漫畵)며, 게임(Game)이며, 사진이며, 영화, 야동 등의 정리벽은 놀랄 만큼 병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게임을 끝내지 못하고서는, 다른 게임에 착수하지를 못한다. 야동에 있어서도 또한 다분히 그런 폐단이 있는 까닭에, 데스크톱에 4,5종 야동을 동시에 플레이하는 일이 별로 없으며, 동영상 플레이어를 켜 놓은 채 외출하는 일도 전혀 없다. 


또, 수집벽(蒐集癖)도 약간 있어, 내가 댓글을 단 신문 기사, 블로그 글들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악플을 달만한 다른 기사, 낚시글도 스크랩을 하여 페북에 링크를 해 두는 것이다. 


요컨대, 내 스마트폰은 내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인터넷은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의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스마트폰은 나를 위주로 한 보잘것없는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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