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무너진 천장과, 내가 지키고 싶은 아이의 미래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결국 천장이 무너지는 꿈.
잠에서 깨어서 꿈해몽을 뒤적이다가
지장기도를 올리고 또다시 눈을 감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뒷산의 절에 다녀왔다.
절에 오르며 문득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친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들의 삶을 떠올리니,
참 외롭고 고단 했겠구나 싶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잠겼다.
남편 역시 같은 밤,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속에 살아 있다.
아버지의 폭력과 냉담함은
그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흉터를 남긴 채.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 나는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있다.
미국 가난한 백인 가정의 세습된 고통과 무너진 공동체.
그들의 **가족사(FAMILY SAGA)**를 읽으며
자연스레 나와 시댁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가난, 분노, 감정표현의 미숙함,
술에 대한 의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물론 나는 제삼자일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용서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남편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
그 오랜 세월,
그의 아버지도 분명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무게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고자 했던 한 인간이었을지도.
파친코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요셉은 노아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노아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노아에게 사람은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용서 없이 사는 삶이란 숨을 쉬고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남편이 언젠가 그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의 무게에 눌려,
가끔은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제발 나 좀 힘들게 하지 마!"하고 소리치는 나.
어쩌면 그것은
삶에 대한 내 분노가 터져 나온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힐빌리 가족과 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이번 세대에서 내가 끊어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과 세상에 대한 안정감,
그리고 반드시 빛은 존재한다는 희망을
물려주어야 한다.
내 아이에게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힐빌리의 노래] 속
깡다구 있고 억척스러운 그 할머니처럼,
나도 자갈치 시장의 할머니처럼 살아내야 한다.
버티고, 지키고,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언젠가 나는 이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것이고,
아이에게 내 인생으로 증명할 것이다.
"그래도 끝내 이겨낼 수 있어."
"나는 그렇게 살아냈어."
그러고 나서,
나는 내 아이의 손을 잡고
쒼나게 "빠빠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괜찮다고.
그 악순환을 끊고 나왔으니까.
내가 정말, 잘 살아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