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6장 적벽대전 (1-3)
208년 9월, 형주자사(荊州刺史)였던 유표(劉表)의 사후 지역세력의 지지를 통해 유종(劉琮)이 자사직을 물려받은지 얼마 후, 중원(中原)과 북방을 안정시킨 한(漢) 제국의 승상(丞相) 조조(曹操)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형주에 대한 정치적 통합을 빠르게 마무리하는 듯 보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조조는 허도 조정을 중심으로 운영체제의 개혁을 통해 제국 시스템을 재건하고자 했으며, 관도대전 승리 이후, 시스템의 핵심기능들을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중원지역과 북부 접경지역을 안정시킨 조조는 시스템 재건을 완성하기 위해 남서부로 향했지만, 형주와 양주(揚州), 그리고 서부의 익주(益州)에 대해서는 중원과는 다른 접근을 선택했습니다.
제국의 경제기반이었던 중원의 경우, 높은 인구 규모 및 농업생산력, 발달된 상공업과 도시들, 그리고 행정 및 경제 네트워크가 남서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원 지역은 강력한 군벌세력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환경을 제공했으며, 세력 확장을 위해서는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원지역은 군사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높은 비용을 충분히 상쇄할 만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높은 ROI, 즉 투자 대비 효율을 제공했습니다. 이에 조조는 중원을 확보할 당시 청주병(靑州兵)과 호표기(虎豹騎) 등 규모와 속도를 앞세운 자신의 군사자산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남서부의 상황은 중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남서부의 각 지역들은 행정적으로는 제국의 주(州)에 속해있었지만, 실제로는 지방세력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손권(孫權) 또한 표면적으로는 양주의 패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그가 가진 권력은 원소(袁紹), 공손찬(公孫瓚) 등 다른 군벌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장강(長江)으로 북부와 남부가 나뉘었던 형주의 상황도 중원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양양(襄陽)을 중심으로 한 형주 북부는 중원에 인접한 탓에 인구 규모 및 경제력이 중원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남부 지역의 경우, 유표 시기에 이르러서야 행정구역이 설치될 정도로 개발이 미진한 상태였습니다. 형주의 인구와 경제력의 70%(추정치, 주6-2)에 해당하는 북부가 곧 형주였기에, 정치적 통합을 완료한 조조 역시 형주 북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이후 양주는 물론 익주 통합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계획은 유비(劉備)라는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형주 북부의 요충지인 강하(江夏)를 관리하던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유비의 지지를 기반으로 조조의 형주 통합과정에서 이탈했으며, 이로 인해 형주 북부에 예상치 못한 군사적 대립이 형성된 것 입니다.
형주 주요 거점에 분산되어 주둔하고 있던 형주의 수군(水軍) 또한 양양군과 강하군으로 나뉘게 되면서, 조조는 형주의 수군 병력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형주에 대한 정치적 통합을 완료함과 동시에, 형주의 병력을 통해 형주를 방어하고, 동시에 형주의 수군으로 양주를 견제하고자 했던 조조의 계획에 문제가 발생한 것 입니다 (주6-3).
결과적으로 형주 내부의 정치적 대립과 유비의 개입으로 인해, 형주 북부는 지역적, 군사적으로 양양과 강하로 나뉘게 되었고, 이어 양주 또한 조조의 통합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208년 11월에 이르면, 조조는 당초 계획을 바꾸어 형주 북부의 실질적 확보를 우선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는 15만 명 규모의 대군 (추정치, 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100만 명 규모로 묘사됩니다)을 가진 조조의 선택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전 조조의 군사행동들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양양을 확보한 조조는 곧 15만 대군을 나누어 빠르게 강하, 강릉(江陵) 등 형주 북부의 주요 도시를 확보하고, 동시에 양주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 손권에 대한 압박과 견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주에 대한 통합이 완료되면 형주의 기존 병력을 바탕으로 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주력을 양주로 이동시킴으로써, 손권에 대한 압박해 양주에 대한 정치적 통합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조가 마주했던 구조적 환경은 그에게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도록 합니다.
주6-2.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인구 기록에 따르면, 형주 7개 군 중 북부의 남양군(南陽郡) 인구는 약 243만 명으로 형주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습니다. 주도인 양양이 위치한 남군(南郡)까지 포함할 경우, 형주 북부는 형주 전체 인구와 경제력의 70% 이상이 집중된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유표 생전에도 남부 4개 군(장사, 영릉, 무릉, 계양)은 행정적 지배력이 완벽히 미치지 못한 미개척지였습니다.
주6-3.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의하면, 조조가 확보할 수 있었던 형주 수군은 총 5만여 명 규모였지만, 유표의 장남 유기가 강하에서 보유하고 있던 수군 전투병력 1만 명은 유비 세력으로 이탈했습니다. 또한 조조가 확보한 수군도 양양과 강릉 등 장강 유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통합과정에서 병력이 이탈하면서, 실제 조조가 운용할 수 있었던 수군 전투 병력은 약 3만명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