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1장 황건 (1)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 의해 서기 25년 건국된 후한(後漢) 제국은, 전한(前漢)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한편, 이전 제국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민생 회복, 경제 재건, 지방 권력 통제 및 군벌의 해체와 같은 광무제의 개혁은 후한이 200여 년간 유지되는 기반이 되었지만, 제국은 결국 220년 위 문제(魏 文帝) 조비(曹丕)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역사 속의 많은 대제국들과 마찬가지로, 후한의 종말은 표면적으로는 환관과 탐관오리의 전횡으로 인한 정치적 부패, 자연재해, 그리고 황건의 난과 같은 혼란으로 인한 내부로부터의 붕괴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전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광무제가 간과한 제국의 시스템, 즉 13주(州) 체제가 내포한 제국의 구조적 불안정성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후한 제국의 강역은 총 13개의 주(州)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이라는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구축된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각 주들이라는 시스템의 개별 구성 요소들이 수행하는 특정 기능들과 기능간 상호의존성에 기반하여 운영되었습니다.
북쪽과 서쪽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주들이 이민족 방어를 통해 제국이라는 시스템의 대외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동안, 중원(中原)에 위치한 6개 주는 제국 시스템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회경제적 기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제국의 구조적 불안정성은 바로 이 13주 체제에 기인합니다.
13주의 기능적 분업화에 기반하여, 200여 년의 시간 동안 작동한 제국의 시스템은 각 주의 상호의존성을 점차 심화시켰지만, 제국은 특정 기능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를 통제하고, 다른 기능이 그 역할을 대체함으로써 시스템의 지속적인 운영을 보장하고 안정성을 유지하는 위기 대응 메커니즘은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대륙이라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제국의 역량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된 13주 체제는, 후한 제국이라는 대규모 시스템이 장기간 작동할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물리적 환경의 제약으로 인한 시스템의 구조적 불안정성이라는 위험요인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후한 13주의 각 기능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제거점(운영 기능): 중원
후한의 13주 중, 중원의 6개 주는 수도 낙양(洛陽)을 포함하는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그 동쪽의 예주(豫州)와 연주(兗州), 북쪽의 기주(冀州)와 청주(靑州), 그리고 서주(徐州)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유역 사이에 위치한 중원 지역에는 당시 약 5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제국 전체 인구의 약 70-75% (추정치, 주1-1)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넓은 평야 지대, 강과 하천 등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높은 농업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높은 인구 규모와 농업 생산력,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상공업의 발전은 시장과 도시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선순환을 기반으로 중원 지역은 제국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군사거점(유지 기능): 북방 3개 주
제국의 국경을 유지하여 시스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역할은 북방 3개 주(유주(幽州), 병주 (并州), 양주(涼州))에 주어졌습니다. 이 지역들은 당시 가장 큰 대외적인 위협이었던 북방 이민족(강(羌), 저(氐), 흉노(匈奴), 선비(鮮卑))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서 기능했습니다.
광무제 이후 후한 제국은 외부에 대한 정복 전쟁을 최소화하는 군사정책기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잠재적인 군벌의 출현을 경계해 왔습니다. 이러한 정책기조에 따라 제국의 상비군은 가능한 최소한의 규모로 유지되었고, 따라서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 대해서는 수세적인 위치에서 방어 중심적인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당시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규군 병력의 약 80% (추정치, 주1-2)가 북방 3개 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수도 및 주요 거점 방어 그리고 치안유지를 위해 제국 내부에 배치된 병력은 약 2만여 명 수준 (추정치, 주1-3)였습니다. 이마저도 수도를 중심으로 한 사례지역에만 수천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다른 주들에는 그보다 적은 규모의 정규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잠재거점(미개발지역): 남부와 서부 4개 주
중원 지역이 수행한 시스템 운영 기능과 북방 3개 주가 수행한 시스템 유지 기능에 비하면, 제국의 남부와 서부에 위치한 4개 주 (양주(揚州), 형주(荊州), 교주(交州), 익주(益州))의 경우, 중원 지역 만큼 개발이 되어있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제국 시스템 내 그 역할과 중요성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장강(長江)이라는 중원과의 자연경계선 및 남부의 습한 기후는 남서부 4개주의 개발이 어렵게 한 요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적은 인구와 낮은 농업 생산력, 이로 인한 낮은 예상 세수(稅收)를 고려하면, 제국 조정(朝廷)의 입장에서 남서부 4개주는 큰 비용과 노력을 들여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과 행정 체계 수립 등, 제국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비용을 지출하기에는 그 효율이 낮은 지역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부와 서부의 4개 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과 제후들이 낙양 조정의 권력과 행정 공백을 메우면서, 자율적인 지방권력을 구축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장차 손 씨(孫氏) 가문의 세력 기반이 될 양주(揚州)는 수춘(壽春)과 장강 하류의 오군(吳郡), 회계군(會稽郡)과 같은 주요 지역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주에 인접한 양주 북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산악지형이었던 탓에, 농업 개발은 물론, 양주 내 지역간 교류도 어려웠고, 이로 인해 지역의 경제 개발은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지역 남부의 산월(山越)등으로 인한 치안 문제는 지역 안정은 물론,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한 상공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음은 물론, 지방세력들이 자체적으로 사병집단을 보유하도록 하는 배경이 됩니다.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에서 한(漢) 황실 부흥을 위한 핵심 거점으로 지목된 형주(荊州)의 경우, 중원에 인접한 장강 이북의 북부지역과 장강 이남 남부지역의 인구밀도 및 생산력 격차가 큰 상태였습니다. 양양(襄陽)을 중심으로 한 형주 북부의 경제력과 인구 규모는 중원의 여느 지역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남부의 경우, 후한 말에 이르러서야 유표(劉表)에 의해 사군(四郡)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여전히 개발이 미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진령(秦嶺)과 대파산맥(大巴山脈), 무산산맥(巫山山脈) 산맥과 삼협(三峽)으로 둘러싸인 익주(益州)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지만, 중심의 성도평원(成都平原), 그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 건설된 수리시설인 도강언(都江堰)은 지역의 안정적인 농업 생산력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렸습니다. 익주목 유장(劉章)의 부친 유언(劉焉)이 낙양의 고위 관직을 버리고 익주 자사를 자청할 만큼, 익주가 가지는 잠재력은 높았지만, 익주를 둘러싼 지리적 장애물, 그리고 익주 남부에서 활동하던 남만(南蠻)의 존재는 익주의 발전 가능성을 제약하는 요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의 지리적 여건이라는 하드웨어적 특성은 제국 시스템을 남부와 서부로 확장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상승시켰으며, 이에 따른 저조한 투자 대비 효율로 인해 남서부에는 제국 시스템의 기본설계, 즉 주 단위 행정구역 구분만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행정구역 내에서는 지방세력들이 낙양 조정의 운영체제 기능을 대신하며 견고한 지방권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원과 남서부간 운영체제의 차이점은 당시 제국 시스템의 작동에는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은 아니었지만, 이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는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170년대 말부터 180년대 초 사이, 후한 제국에는 가뭄, 홍수, 역병 등의 재해가 연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특히 황하 범람 등의 재해는 제국 시스템 운영 역량의 기반인 중원 지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원에 파견된 제국의 관리들은 중원 지역의 기능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당장 낙양 조정에서 요구하는 세수를 확보에만 집중했습니다.
농업 및 사회 기반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 예전과 같은 수준의 세금 징수는 백성들에게는 너무 가혹했으며, 피해 복구를 명목으로 부역에까지 동원되자 제국 시스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임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등장한 장각(張角)과 그 형제들은, 태평도(太平道)를 전파하며 이미 백성들의 신뢰를 상실한 제국 시스템의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장각의 세력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었고, 마침내 184년, 후한 영제(靈帝) 광화(光和) 7년, 중원의 핵심인 기주 일대를 중심으로 기존 제국 시스템 붕괴의 시작인 황건(黃巾)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황건의 난이 발생하게 된 것은,
1) 중국 대륙이라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중원 지역이 보유한 하드웨어, 즉 인구와 농업 기반은 제국 시스템이 중원 지역을 기반으로 설계되도록 했으며,
2) 이로 인해, 중원 지역에 대한 제국 시스템의 의존도는 점차 높아졌지만, 그에 대한 구조적 대안은 부재한 상태였고,
3) 자연재해로 인해 중원 지역이 그 역량을 상실했음에도 대안이 없던 낙양 조정은 중원에 대한 압박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편, 황건의 난이 후한 제국 시스템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발생되었다면, 황건의 난이 빠르게 확산되며 시스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제국 시스템이 가지는 또 다른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주1-1.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의하면 150년 경 후한 제국의 전체 인구는 약 4천9백만 명 - 5천6백만 명 규모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통상적으로 황하 유역과 중원의 인구는 전체 약 70% 규모였으며, 이는 호적에 등재된 호구수를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등록되지 않은 인구를 포함하면 당시 중원에 거주한 인구 규모는 제국 전체 인구의 약 75%가량으로 추정되며, 기주에만 약 10%에 해당하는 6백만 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주1-2.
후한서(後漢書) 서강전(西羌傳)에 따르면 당시 제국은 서북쪽 강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상당부분을 지출하고 있었으며, 약 3만 명 규모의 병력이 서북 접경인 양주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북방의 선비, 남흉노등에 대응하기 위해 유주 및 병주에는 1만 명 규모의 기병이 상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주1-3.
후한서(後漢書) 황건열전(黃巾列傳)에 의하면, 184년 황건의 난이 발생하자 낙양 조정은 도성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