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과 디테일의 사이

전통주 구독 서비스 '술담화' 소믈리에 _ 나의 반쪽짜리 일기 2-2-1

by 이재민

나는 양조인이라는 '사람'과 전통주라는 '상품'의 이야기를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라는 것에는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나에게 우선시 되는 건 정확한 정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주로 글로 이뤄진다. 소비자들은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하기도 하며 때때로 내가 작성한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주기도 한다. 양조인들은 좋은 이야기 고맙다며 본인들의 상세페이지 혹은 앞으로 홍보할 때 문구를 가져가서 쓰고 싶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난 술에 대한 정보를 글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술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선 소믈리에로서의 역량을, 글로 풀어내는 데 있어선 에디터로서의 역량을 더 필요로 한다. 두 가지의 역량이 모두 뛰어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고민이 생겨난다.


'어떤 일을 먼저 하지?'라는 우선순위도 중요하지만, 일 안에서 무엇을 우선으로 가져가며 일을 할지의 우선순위도 중요하다. 그것은 일의 목표나 목적에도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정하냐에 따라 기본과 디테일이 정해진다. 같은 일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겐 디테일이라 불리고 누군가에겐 기본이라고 불린다.


만약 소믈리에로서의 역량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술에 대한 이해력이나 지식을 우선순위를 두며 맞춤법 하나 틀리는 것에 대해선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에디터로서의 역량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글의 흐름이나 문법 등을 우선순위를 두며 부족한 술에 대한 정보는 현란한 글솜씨로 대신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는 내 생각이고


기본과 디테일의 차이가 분명한 듯 글을 써내려 왔지만 사실 둘을 구분 짓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본적인 일인 듯이 기고만장할 필요는 없으며 디테일은 챙겨도 그만, 안 챙겨도 그만이란 안일한 생각으로 일을 해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인간이 참 간사한 게 실수 하나가 생기면 '그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곤 한다. 그게 나다.


서론이 길었다. 이번 2월의 회고에서는 기본과 디테일 사이에서, 실수마저 합리화시키려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01

숲이 먼저다.

2월 28일부터 '마음을 여는 술들'이라 부르는 술담화 자체 기획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 기획상품 안에는 3종의 술과 큐레이션 카드가 담겨있다. 큐레이션 카드라 하면 술의 맛과 향은 물론 추천하는 음식이나 술에 담긴 이야기 등등을 담아낸 카드다. 술과 마찬가지로 큐레이션 카드도 박스 안에 담기 위해선 판매하는 날짜보다 미리 준비되어야 한다. 여기서 준비란 글을 작성하고 인쇄까지 마쳐야 한다는 뜻이다.


큐레이션 카드는 보통 내가 작성한다. 이 기획 박스 안에 담겨있는 카드도 내가 작성했다. 카드를 인쇄한 후 남은 작업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선 보통 1달이란 시간을 앞서 작업한다. 2월 마지막 주에 상품을 오픈했으니 1월 중순에서 말 정도에 큐레이션 카드 작업을 완료한 셈이다.


이 글을 대표님이 보실 수 도 있다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약간의 밑밥을 깔자면, 이 글을 작성하고 있을 당시 나는 일이 참 많았다. 1월 회고에서도 언급한 테이스티 나인 콜라보 작업이 있었고, 매월 서비스하는 담화박스 관련 업무도 있었다. 더구나 설날(=연휴라 불리는 것)까지 있어서 마음은 급할 대로 급해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설날 전에 발주를 잘 넣었기에 그럭저럭 마음 편히 설날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아니, 이미 발생했던걸 제품 촬영을 할 때서야 발견하게 됐다.


팀원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용은 오타 제보였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스스로도 정말 창피한 오타였다. 문제는 이미 발견됐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난 곧바로 회사에 공유를 했으며 수정 후 다시 인쇄를 하게 됐다.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역시 너무 급하게 업무를 진행한 게 탈이었을까?', '다른 일도 아닌 큐레이션 업무를... 왜 그랬을까' 등의 자기 자책으로 생각을 시작했다. 실수(혹은 실력)가 들통 나니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란 걸 금세 깨닫고 자기 합리화에 들어가게 됐다. '그래, 내가 뭐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배워온 사람도 아니고..', '너무 바빠서 그랬어'와 같은 생각은 나름대로 마음을 진정시켜주기엔 충분했다. 허나, 실수로 인해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혀졌을 뿐 편안하진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 편안하지 않은 마음마저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왜 에디터와 소믈리에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우리나라 술을 알리는 사람이다. 지금은 그 도구가 글일 뿐이지 글을 쓴다고 에디터로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술을 좀 안다고 소믈리에로 불릴 만한 사람도 아니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나라 술의 이야기와 가치를 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디터의 역량과 소믈리에의 역량을 기분이나 상황 따라 저울질할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술의 이야기와 가치를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맞는 이치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의 일을 넓게 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글을 쓴다고 딱 글 쓰는 업무에만 집중을 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글 잘 쓰기!'라는 한정적인 목표만을 갖고 그 작은 세상 속에서 온갖 스트레스는 다 받게 된 거다.


간혹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목표로 두어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번 계기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생각의 자유만큼 자유로운 게 뭐가 있으랴. 처음부터 생각에 한계를 둘 필요는 없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숲을 먼저 보자는 이야기다.


글을 잘 쓰고, 술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때에 따라 기본이나 디테일로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함께 가져가야 할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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