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에 내 생각을 입힌 적바림을 저장합니다
카롤린 봉그랑(Caroline Bongrand)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Le Souligneur)를 읽은 것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이었습니다. 소설은 한 젊은 여자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속에서 우연히 낙서를 하나 발견하면서 시작합니다. 누구인지 모를 어떤 남자가 그어 놓은 밑줄이 메시지가 되고 의미가 되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친구로부터 무심코 빌려 읽은 이 얇은 소설책 한 권의 제목과 내용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머리에 남게 될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에게 책은 때 묻지 않게 깨끗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그려낸 세계에 들어갔다 나와보니 이제는 밑줄 긋기가 어떤 낭만적 행동처럼 느껴졌습니다. 밑줄을 긋는 행동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고 생각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는 그 또한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적바림'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한 교수님은 자신의 독서 습관을 '적바림'으로 설명해 주셨는데, 적바림은 순우리말로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서 글로 간단히 적어 두는 것 또는 그런 기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때 그 교수님은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여백에 그 생각을 메모해 볼 것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대학 1학년 신입생 시절, 적바림을 말씀해 주시는 교수님의 모습과 강의장의 한 장면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나에게 밑줄 긋기와 적바림이라는 말의 시작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밑줄 긋기와 적바림은 나의 독서습관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적바림을 합니다. 요즘에는 마음에 드는 노트 한 권을 옆에 두고 연필로 수시로 적바림을 하기도 합니다. 순식간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껴지는 감상이 휘발되어 날아가기 전에 노트에 붙잡아두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그 문장이 내 머리와 가슴에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언가에 내 생각을 입혀 적바림을 해둔 것들이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들을 이 브런치북에 저장해두려고 합니다.
좋은 문장들, 좋은 생각들을 저장해 두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다시 그리고 함께 꺼내어보고 싶습니다.
ⓒ 이재상 2025